재건축 분담금 해결책이 용적률이라면…그것은 자본잠식 아닌가
주택은 시간이 지나며 감가되는 자본재이고, 낡은 건물을 다시 짓는 비용은 원칙적으로 소유자가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재건축은 오랫동안 낮은 용적률과 추가 개발권을 활용해 새로운 입주자에게 토지지분을 팔고 그 돈으로 기존 소유자의 건축비를 충당해왔다. 이는 감가상각비를 없앤 것이 아니라 미래의 토지지분과 신규 입주자에게 비용을 넘긴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소모된 건물을 복구하기 위해 영구자산인 토지의 원본을 처분하는 자본잠식에 가깝다. 용적률을 계속 높여야만 재건축이 가능한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미래에 더 많은 개발권을 받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소유자가 자신이 선택한 규모와 위치의 주거자본을 유지·대수선·재건축할 경제력을 갖고 있느냐이다. 초고층 아파트의 진짜 문제도 ‘더 높게 지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땅을 더 팔지 않고도 스스로 감가상각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있다.
초고층 아파트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논리는 대체로 비슷하다.
지금도 이미 용적률이 높다. 30년, 40년 뒤 건물이 낡아도 더 높게 지을 여지가 별로 없다. 일반분양 물량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없으니 재건축 사업성이 떨어진다. 결국 엄청난 추가분담금을 부담해야 하고, 일부 초고층 아파트는 처치 곤란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이상한 전제가 숨어 있다.
낡은 집을 다시 짓는 비용은 왜 반드시 용적률을 더 받아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아서 마련해야 하는가.
주택도 자본재다.
콘크리트는 늙고, 배관은 삭고, 승강기는 교체해야 하며, 외벽과 전기·기계설비에도 수명이 있다. 아무리 비싼 아파트라도 건물은 사용하면서 조금씩 소비된다.
그렇다면 주택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지 오늘의 집값을 지불하는 일이 아니다.
그 집을 앞으로 유지하고, 고치고, 언젠가 수명이 다했을 때 다시 만드는 비용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아파트는 30년 뒤 재건축 사업성이 있을까?”
가 아니다.
더 기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이 규모와 이 위치의 주택이 요구하는 장기적인 유지·갱신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초고층이라면 유지·보수·대수선 비용이 더 클 수 있고, 철거와 재건축 역시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더 비싼 자본재를 소유하는 문제다.
고급 자동차를 샀는데 15년 뒤 부품값과 정비비가 비싸다고 해서 누군가 새 구매자를 붙여 그 돈으로 내 자동차를 새 차로 바꾸어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독 아파트에서는 다른 사고가 익숙해졌다.
건물이 낡았다.
다시 지으려니 돈이 많이 든다.
그러니 용적률을 더 달라.
새 아파트를 더 지어 새로운 사람들에게 팔고, 그 돈으로 기존 소유자의 집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재건축 사업성’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자산의 구조를 놓고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기존 소유자는 낡아 없어진 건물이라는 자본을 복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의 일부를 사실상 외부에 넘긴다.
저층 아파트 한 동을 헐고 훨씬 많은 세대를 지어 일반분양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 몇 채를 더 만들어 파는 일이 아니다.
기존 토지에 대해 기존 소유자가 독점적으로 누리던 공간과 개발권 일부를 새로운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낡은 건물을 다시 만들기 위해 영구적으로 남아 있던 토지자본의 일부를 처분하는 것이다.
경제적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상당히 명백한 자본잠식 행위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잠식은 회계장부상의 ‘자본총계가 납입자본에 미달한다’는 좁은 의미의 자본잠식과는 다르다.
더 넓고 본질적인 의미다.
소모된 자산을 복구하기 위해 다른 자산의 원본을 팔아 충당하는 것.
기업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업이 30년 동안 사용해 기계가 낡았다.
새 기계를 사야 한다.
그런데 회사는 지난 30년 동안 감가상각에 대응하는 자금을 축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장을 둘러싼 토지를 조금씩 팔아 새 기계를 산다.
첫 번째 교체는 가능하다.
두 번째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토지는 계속 줄어든다.
언젠가는 더 팔 땅이 없다.
누구도 이것을 지속가능한 자본관리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도시의 재건축에서는 이와 유사한 일을 성공적인 재건축 모델로 받아들여왔다.
20층이 낡으면 35층을 짓는다.
늘어난 15층에 해당하는 새로운 주택을 팔아 기존 주민의 건축비를 충당한다.
35층이 다시 낡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에는 50층을 지으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50층도 언젠가는 늙는다.
그때는 70층인가.
100층인가.
도시의 토지는 유한하고 용적률도 무한히 높일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원리적으로 끝이 정해져 있다.
용적률 상향은 감가상각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을 미래의 토지지분과 신규 입주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고층은 앞으로 용적률을 더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설명은 문제의 원인을 거꾸로 본다.
초고층이 특별히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고층은 우리가 그동안 외면했던 정상적인 질문을 더 빨리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미래의 소유자가 자기 돈으로 자본갱신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 주택이라는 것.
그것이 왜 이상한가.
자신이 가진 건물이 낡으면 소유자가 고치고, 수명이 다하면 다시 만드는 것이 원래 자산소유의 기본 원리다.
그동안 한국의 저용적률 아파트 재건축이 너무 예외적이었던 것이다.
건물은 소비됐는데 그 비용을 소유자가 온전히 부담하지 않아도 됐다.
서울의 토지가격이 올랐고, 낮은 용적률 덕분에 미사용 개발권이 남아 있었으며, 새로 들어오는 일반분양자들이 높은 토지가격을 지불했다.
기존 소유자는 그 돈으로 자신이 30년간 사용한 건물을 새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심지어 더 넓은 집을 받기도 했다.
이 특별한 경험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상한 기대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아파트는 낡아도 내가 다시 짓는 비용을 전부 준비할 필요가 없다.
기다리면 용적률이 올라간다.
일반분양자가 들어온다.
땅의 일부를 나눠주면 그 사람들이 내 새집의 상당 부분을 지어준다.
그러나 이것은 감가상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비용 부담자를 바꾼 것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기존 소유자의 토지지분이라는 원본자산도 조금씩 희석된다는 사실이다.
집의 수명이 다할 때마다 더 많은 이웃을 끌어들여 그들의 토지대금으로 내 집을 다시 짓는 방식은 주택의 감가상각을 해결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 비용을 아직 들어오지 않은 다음 사람에게 넘기면서 동시에 자신의 토지자본 일부를 처분하는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최근 초고층 아파트의 노후화를 둘러싼 걱정도 전혀 다르게 읽힌다.
“미래에 더 이상 용적률을 올릴 수 없다.”
이것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사용하던 편법적인 조달수단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그 건물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 규모의 주거자본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갱신할 경제력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위치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좋은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미래에 용적률을 더 받아 일반분양을 잘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 지역의 주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서울 핵심지역의 고급주택이라면 건물이 오래되어도 높은 관리비와 거액의 대수선비를 부담하면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수요가 존재할 수 있다.
반대로 수요가 약한 지역의 대규모 주거시설은 기술적으로 수리가 가능하더라도 그 수리비를 지불할 사람이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은 건축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다.
건물의 물리적 수명이 끝나기 전에 경제적 수명이 먼저 끝날 수도 있다.
그래서 주택을 살 때 본래 해야 할 계산도 달라져야 한다.
아파트 가격이 10억원인가, 20억원인가만 볼 것이 아니다.
재건축 기대이익이 얼마인지부터 계산할 것도 아니다.
내가 이 정도 규모의 주거자본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관리비를 낼 수 있는가.
대수선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건물이 수명을 다했을 때 다른 사람의 토지대금에 의존하지 않고 내 몫의 건축비를 부담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 경제력에 비해 너무 큰 자본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내가 감가상각을 감당할 수 있는 규모와 위치에서 집을 찾아야 한다.
주택은 가격이 오르는 숫자가 아니라 사용하면서 닳는 자산이다.
그 감가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집값 상승만을 보고 더 크고 더 비싼 주거자본을 보유한다면, 시간이 흐른 뒤 문제는 반드시 나타난다.
과거에는 서울의 토지가격 상승과 추가 용적률이 그 문제를 가려줬다.
하지만 가려졌다고 해서 비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만약 낡은 집을 다시 짓기 위해 반드시 용적률을 높여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 집을 감당할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 자산의 유지비를 자기 소득과 저축으로 충당하지 못하고, 원본자산인 토지지분 일부를 계속 팔아야만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을 부유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개인이 생활비가 부족할 때마다 보유 주식을 조금씩 팔아 쓴다면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이 자산의 원본을 잠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업이 영업으로 설비교체비를 마련하지 못해 보유 토지를 계속 처분한다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한다.
그런데 주택에서는 집 한 채를 유지하기 위해 토지의 개발권을 계속 처분하는 것을 오히려 ‘사업성 확보’라고 표현한다.
용어가 현상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건축의 사업성이 없다는 말은 때때로
“그 집을 다시 짓는 비용을 집주인이 내야 한다”
는 뜻에 불과하다.
그것은 재건축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정상적인 상태다.
낡은 건물을 다시 만드는 데 돈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해서 도시가 반드시 더 많은 용적률을 제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용적률은 공짜 돈이 아니다.
추가 용적률을 준다는 것은 같은 토지를 더 많은 사람이 나눠 갖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기존 주민에게는 개발이익처럼 보이지만 도시 전체에서는 공간과 기반시설을 더 많은 사람에게 배분하는 결정이다.
따라서 개인의 감가상각비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가 계속 밀도를 높여줘야 한다는 주장은 궁극적으로 지속가능할 수 없다.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높일 수 없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본래의 회계가 나타난다.
건물을 사용했다.
건물이 낡았다.
다시 짓는 데 돈이 든다.
그 돈은 건물의 소유자가 부담한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 평범한 이야기를 잊고 살았던 셈이다.
서울의 저층 아파트가 재건축을 통해 엄청난 자산가치를 만들어낸 것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의 산물이었다.
낮은 용적률.
급격한 도시 성장.
폭발적인 토지가격 상승.
계속 유입되는 신규 수요.
상대적으로 낮았던 건축비.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건물의 감가상각비를 토지의 추가 개발가치로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특수한 조건을 정상적인 권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집이 낡았으니 용적률을 더 받아야 한다는 사고는 결국 이런 말과 같다.
내가 소비한 건물을 복구하기 위해 내 토지자본 일부를 팔 수 있도록 도시가 계속 새로운 개발권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것은 자본의 축적이 아니다.
오히려 축적해 둔 원본을 조금씩 꺼내 쓰는 행위다.
그리고 원본을 꺼내 쓰는 방식으로는 영원히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초고층 아파트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30년 뒤 재건축할 수 있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땅을 더 팔지 않고도 우리가 사용한 집을 스스로 유지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가.
그 답이 ‘아니오’라면 문제는 용적률 부족이 아니다.
우리의 주거수준이 우리의 소득과 자본축적 능력에 비해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간극을 지난 수십 년간 서울의 토지가격 상승과 개발권 매각이 대신 메워줬던 것이다.
이제 그 공간이 줄어드는 순간을 우리는 ‘재건축 사업성 악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른 이름을 붙여보면 현상이 훨씬 선명해진다.
감가상각을 감당하지 못한 자산의 자본잠식.
낡은 집을 다시 짓기 위해 땅을 팔아야 한다면, 문제는 땅을 더 팔 수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처음부터 물어야 했다.
나는 이 집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