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시대에도 사람은 실패자가 아니다 — 자살관광버스가 남긴 메시지

1998년 일본 영화 《자살관광버스》는 빚과 생활고에 몰린 사람들이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기기 위해 함께 죽음을 계획한다는 블랙코미디다. 버블 붕괴 이후 구조조정과 자살 급증이 이어지던 당시 일본 사회의 불안을 배경으로 보면,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죽음 자체보다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돈과 생산성으로 계산하게 되는 순간에 있다. 저성장·고령화 시대를 맞는 한국도 비슷한 위험을 피하려면 경제적 실패를 인간의 실패로 바꾸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지만 서로를 실패자로 만들지 않을 수는 있다. 앞으로 쉽지 않은 시대가 오더라도 서로를 조금 더 붙잡아주고, 자기 자신에게도 너무 빨리 판결을 내리지 말자. 우리 모두 힘내고, 무엇보다 오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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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일본 영화 한 편을 보고 꽤 오랫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1998년에 나온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자살관광버스》, 원제는 《生きない(Ikinai)》다. 우리말 제목만 놓고 보면 자극적인 소재를 앞세운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묘한 블랙코미디다.

영화에는 삶의 막다른 곳까지 밀려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사람, 가족에게 돈을 남겨주고 싶은 사람, 병원비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출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다.

그들이 생각해낸 마지막 해결책은 기괴하다.

단체 관광을 떠난 것처럼 꾸민 뒤 버스 사고로 모두 죽고, 사망보험금을 가족에게 남기자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충동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냉정하게 계산한다.

살아 있으면 빚이 남는다. 죽으면 보험금이 나온다.

살아 있으면 가족에게 부담이 된다. 죽으면 가족에게 돈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하나의 경제적 자산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 있는 경우’와 ‘내가 죽은 경우’를 비교하고, 후자가 가족에게 더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계산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무거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비장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출발 당일 계획을 전혀 모르는 젊은 여성 미츠키가 우연히 버스에 올라탄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미츠키는 끝말잇기를 하자고 하고, 여행을 즐기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죽으러 가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웃는다.

밥을 먹고, 농담하고, 싸우고,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함께 보내면서 죽음은 조금씩 멀어지고 사람들이 다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순간도 찾아온다.

불치병에 걸린 한 참가자가 실제로 죽는다.

죽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정작 죽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그때까지 그들이 생각했던 죽음은 보험약관 속 숫자였고 계획표 속 일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사람의 죽음은 전혀 다르다.

한 번 일어나면 되돌릴 수 없고,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죽으러 가는 버스에서 새로운 생명의 존재가 발견된다.

결국 사람들은 버스를 멈춘다.

죽지 않기로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영화가 된다.

삶에 절망한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관객도 안도한다.

그래, 결국 이 영화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였구나.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순간 그 안도감을 잔인하게 뒤집는다.

계획을 주도했던 아라가키는 사람들의 변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자 절벽으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나머지 사람들은 버스를 돌려 다시 일상으로 향한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우연한 교통사고가 난다.

그리고 모두 죽는다.

20여 년 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충격을 받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죽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순간, 영화는 그들에게 삶을 돌려주지 않는다.

잔인하다.

허무하다.

도대체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싶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를 돌아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인다.

1998년의 일본은 버블경제 붕괴의 후유증이 사회 깊숙한 곳까지 번지던 시기였다.

1990년대 초 버블이 붕괴한 이후 일본 경제는 오랫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기업들이 흔들렸고, 금융기관이 파산했으며, 평생직장이라고 믿었던 회사들도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1997년에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충격까지 겹쳤다.

‘회사는 직원을 지켜주고, 직원은 회사를 위해 평생 일한다’는 전후 일본사회의 암묵적인 약속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중년 남성들에게 그 충격은 컸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직장과 가장이라는 역할에 지나치게 강하게 묶여 있던 사회였다.

회사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월급을 잃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족을 부양하지 못한다는 뜻이었고,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까지 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자살자는 1997년 약 2만3500명에서 1998년 약 3만1700명으로 한 해 만에 급증했다.

처음으로 3만 명을 넘어선 해였다.

경제적 어려움과 실업, 부채 문제가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됐고 특히 중년 남성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그런 시대에 《자살관광버스》가 나왔다.

영화 속 사람들의 생각도 바로 그 시대의 상처를 닮아 있다.

“나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나는 돈을 벌지 못한다.”

“그러면 나는 가족에게 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죽어서 보험금을 남기는 것이 가족에게 낫다.”

그 지점까지 간다.

영화가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죽으려고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바라보면서

내가 얼마를 버는가, 내가 얼마의 빚을 졌는가, 나 때문에 가족이 얼마를 부담하는가, 내가 죽으면 얼마의 보험금이 나오는가,

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자기 존재 전체가 손익계산서의 한 줄이 되어버린 것이다.

20년 전에는 그것이 낯선 일본사회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우리 사회를 바라보다 보니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든다.

혹시 우리 역시 비슷한 시대를 통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도 오랫동안 성장하는 사회였다.

부모 세대보다 자녀 세대가 더 잘살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열심히 일하면 조금씩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직장을 잡고,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자녀를 교육하고, 은퇴를 준비하는 것이 평범한 인생의 경로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은 그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성장률은 낮아지고 있다.

인구는 빠르게 늙어간다.

일하는 사람은 줄고 부양해야 할 사람은 늘어난다.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집값과 교육비, 노후비용은 개인과 가족에게 큰 부담이다.

한때는 50대가 한창 일할 나이였지만 누군가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직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다.

평생 모은 돈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도 있다.

집을 마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녀에게 충분한 것을 해주지 못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노년이 되었는데도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일 자체만이 아니다.

삶에서는 누구에게나 실패가 찾아온다.

진짜 위험한 것은 경제적 실패가 인간으로서의 실패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사업이 실패했다.”

라는 문장이

“내가 실패한 사람이다.”

가 되고,

“직장을 잃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다.”

가 되고,

“자녀에게 재산을 많이 남기지 못한다.”

“나는 부모로서 실패했다.”

가 되는 순간이다.

《자살관광버스》의 사람들은 정확히 그곳까지 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를 뒤집으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데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 자신에게 판결을 내린다.

내가 실패했으므로 내가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그래서 이 영화가 지금 다시 생각하면 더 무섭다.

우리는 앞으로 가난해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만날지도 모른다.

성장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성장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문제다.

모두가 집을 살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가 안정적인 직장을 평생 유지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가 자녀에게 많은 재산을 남길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가 노후까지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사회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그것은 당신이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면 견디기 어려운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성장률이 낮아져도 사람의 가치까지 낮아질 필요는 없다.

집이 없다고 실패자가 아닌 사회를 만들면 된다.

직장을 잃어도 사람의 경력과 존엄까지 사라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면 된다.

가난한 노인이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만들지 않으면 된다.

젊은 사람이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인생 전체에서 탈락한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너무 쉽게 실패자라는 판정을 내리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성공시켜줄 수는 없다.

그런 사회는 아마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만들 수 있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경제가 좋을 때에는 서로에게 조금 냉정해도 사회가 굴러갈 수 있다.

내가 힘들어도 내년에는 월급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는 시대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훨씬 중요해진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기보다 잠시 옆에 앉아주는 것.

사업에 실패한 친구에게 “그러게 왜 그랬느냐”고 말하기 전에 밥 한 끼 사주는 것.

직장을 잃은 사람에게 그의 인생 전체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부모가 늙고 경제력을 잃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

자녀가 남들보다 조금 뒤처졌다고 해서 부모가 먼저 절망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조금 너그러워지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다.

남에게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을 자기 자신에게는 하지 못한다.

친구가 사업에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내가 실패하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남의 자녀가 취업이 늦으면 때가 있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내 자녀가 늦으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걱정한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는 건강이 제일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내가 어려워지면 통장잔액으로 내 인생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앞으로 정말 어려운 시대를 지나가게 된다면 더욱 그렇다.

《자살관광버스》에는 이상한 역설이 하나 있다.

죽으려고 버스를 탄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다시 살고 싶어진다.

농담 몇 마디 때문에 살고 싶어진다.

누군가와 밥을 먹다가 살고 싶어진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다가 살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살고 싶어진다.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고 싶어진다.

거대한 철학이 그들을 구한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물론 영화는 그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주지 않는다.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한 사고로 죽는다.

그 결말 때문에 처음에는 영화가 인간의 삶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래 생각하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죽으러 출발했을 때와 마지막 사고를 당했을 때는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처음의 그들은 죽고 싶어 했다.

마지막의 그들은 살고 싶어 했다.

결과는 같아도 그 사이에 있었던 시간은 같지 않다.

인간에게 삶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열심히 산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조심한다고 모든 불행을 피할 수도 없다.

때로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실패한다.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어려움이 찾아온다.

뜻하지 않은 병을 얻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자기 인생을 너무 빨리 판결해서는 안 된다.

오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같을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가 없다.

오늘 내가 실패했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늘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사람이 내일은 아주 사소한 이유 하나 때문에 다시 살아보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이유를 서로가 만들어줄 수도 있다.

거창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끔 전화하는 것.

밥을 함께 먹는 것.

잘 지내느냐고 묻는 것.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실패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충분히 잘 살아왔다고 부모에게 말해주는 것.

남들만큼 성공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미워하는 친구에게 그 정도로 사람의 값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그런 사소한 일이 어쩌면 생각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많은 것을 견뎌야 할 것이다.

고령화를 견뎌야 한다.

저성장을 견뎌야 한다.

자산과 소득의 격차를 견뎌야 한다.

부모 세대에게 당연했던 것을 자녀 세대는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는 잘되고 누군가는 잘되지 않는 현실도 마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의 가치를 경제적 성과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서로를 실패자로 만들지 않을 수는 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사회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에 실패했어도 괜찮다.

집을 사지 못했어도 괜찮다.

직장에서 밀려났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자녀가 조금 늦게 자리 잡아도 괜찮다.

노후준비가 완벽하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다.

그리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인생의 계획과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어도 괜찮다.

우리의 삶은 손익계산서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자산과 부채 사이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함께 먹었던 밥이 있고,

아이를 키우며 보낸 시간이 있고,

친구에게 건넨 말이 있고,

부모를 돌본 시간이 있고,

누군가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준 기억이 있다.

그것들도 모두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는 예전보다 조금 덜 부유한 사회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오래 일해야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서로를 대하는 마음까지 가난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힘든 사람에게 실패자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자.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그 이름을 붙이지 말자.

누군가 지쳐 있으면 조금 기다려주고,

누군가 넘어지면 손을 내밀고,

내가 넘어졌을 때는 그 손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잡자.

살아가다 보면 다시 웃을 일이 생긴다.

죽으러 떠난 버스 안에서도 끝말잇기를 하다가 웃었던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우리 모두 어떻게든 잘 견뎌냈으면 좋겠다.

부자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

계획했던 인생과 달라져도 괜찮다.

가끔 실패해도 괜찮다.

조금 쉬었다 가도 괜찮다.

서로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자기 자신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자.

우리 모두 힘냅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살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