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패권을 꿈꾸며 떠나려던 미국을 누가 붙잡았는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나토 동맹국에 더 많은 방위 부담을 요구하면서, 중동과 유럽에 직접 군대를 투입하는 비싼 패권에서 달러·금융제재·동맹을 활용하는 값싼 패권으로 전환하려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동맹의 신뢰를 걸어 미국을 중동에 묶었고, 이란은 미군기지와 호르무즈 해협을 위협하면서 중국에 석유를 팔고 위안화로 결제받아 미국의 제재력을 약화시켰다. 달러패권을 흔들기 위해 미국과 같은 군사력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 미국을 전쟁에서 이기는 대신 달러를 거치지 않는 거래망을 만들고, 제재를 받아도 생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 됐다. 미국이 이를 방치하면 패권의 신뢰가 무너지고, 막으려 군사력을 사용하면 떠나려던 전쟁터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미국을 붙잡은 것은 이스라엘이나 이란만이 아니라, 비용은 내려놓으면서 패권의 권리와 특권은 유지하려 했던 미국 자신의 모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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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던 미국을 누가 붙잡았는가

미국은 세계에서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패권을 포기하려던 것은 아니다. 패권을 유지하는 방식에서 전쟁과 점령, 장기 주둔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려 했다.

미국은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하며 20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다. 국방 전략의 중심도 중동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중국과의 장기 경쟁으로 이동했다. 최근 미국 국방전략 역시 중국 억제와 본토 방어를 우선하면서, 유럽과 다른 지역의 동맹국에는 더 많은 방위 부담을 맡기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토 회원국들이 2035년까지 국방·안보 지출을 국내총생산의 5%까지 높이기로 한 것도 같은 흐름이다. 미국은 동맹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는 동맹에서 벗어나려 했다.

미국이 원한 것은 세계에서의 퇴장이 아니라 비싼 패권에서 값싼 패권으로의 전환이었다.

병력은 줄이되 군사기지는 유지하고, 동맹국이 스스로 방위비를 내게 하되 최종적인 결정권은 미국이 갖는 방식이다. 직접 국가를 점령하지 않더라도 달러와 금융제재, 기술통제와 해상교통을 통해 세계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미국에는 훨씬 효율적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려면 수십만 명의 병력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그러나 달러 결제망에서 한 국가를 배제하는 데는 그런 규모의 군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미국 은행과 거래하지 못하게 하고, 달러 결제를 막고, 선박과 보험회사에 제재를 가하면 상대국의 무역과 금융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금융적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붙잡은 것은 이스라엘인가, 이란인가

그런데 미국은 다시 중동의 전쟁에 묶였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자신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이스라엘이 이란과 직접 충돌하면 미국은 동맹국을 지원할 것인지, 아니면 중동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거리를 둘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외면하면 미국의 동맹 보장은 약해진다. 다른 동맹국들도 위기의 순간에 미국이 실제로 움직일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면 미국은 떠나려던 전장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

이란은 또 다른 방식으로 미국의 퇴로를 막았다.

이란이 미국의 공격에 대응해 미군기지와 선박, 걸프 지역의 에너지시설과 호르무즈 해협을 위협하면 미국은 이를 단순한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취급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미국과 이란은 공습과 미군기지 공격을 주고받았고, 미국은 이란에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선박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동맹의 신뢰를 걸어 미국을 붙잡았고, 이란은 미군과 석유 수송로를 공격할 수 있다는 능력으로 미국을 붙잡았다.

하지만 미국을 붙잡은 가장 근본적인 존재는 이스라엘도 이란도 아니다.

미국 자신이 만들어놓은 질서다.

미국은 중동에서 병력을 줄이고 싶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안보 보장, 걸프 지역의 미군기지,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이란에 대한 금융제재와 달러질서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비용은 줄이고 싶었지만 권리는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미국이 떠난 뒤에도 모든 국가가 미국의 규칙을 따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질서를 유지하려면 누군가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미국이 그 비용을 더는 부담하지 않겠다고 하면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질서를 따라야 할 이유도 약해진다.

미국과 같은 군사력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미국의 경쟁국들이 달러패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국과 같은 군사력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미국 항공모함을 침몰시킬 항공모함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전 세계에 미군과 같은 규모의 기지를 세울 필요도 없었다.

미국의 패권은 군사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러의 힘은 세계 각국이 무역대금을 달러로 결제하고, 외환보유액을 달러 자산으로 보유하며, 기업과 은행이 미국 금융시장을 이용하는 데서 나온다. 미국 금융시장의 규모와 유동성, 안전자산의 공급,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달러의 중심적 지위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달러패권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미군을 군사적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다.

달러를 거치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는 길을 조금씩 만드는 것이다.

모든 국가가 동시에 달러를 버릴 필요도 없다. 석유거래의 일부를 위안화로 결제하고, 자국 통화로 교역하며, 미국이 통제하지 않는 은행과 결제망을 이용하면 된다. 그림자 선단과 비서방 보험회사, 환전상과 우회 금융망을 활용해 미국의 제재를 견딜 수 있다는 사례를 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달러가 당장 세계통화의 지위를 잃지 않더라도 미국 제재의 효과가 낮아지면 미국이 얻어온 패권의 이익은 줄어든다.

미국의 힘은 달러 사용률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상대국이 미국의 금융망에서 배제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제재 대상국이 달러 없이도 석유를 팔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미국의 가장 값싼 무기는 무뎌진다.

중국과 이란의 관계는 이를 보여준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중국은 이란산 원유 수출의 약 90%를 구매하고 있으며, 이란은 석유 판매대금을 주로 중국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다. 이란의 환전상과 그림자 금융망은 위안화로 받은 수익을 이란군과 관련 조직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통화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이란의 경제 규모만으로 달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위안화 역시 아직 달러와 같은 수준의 개방성과 유동성을 갖춘 세계 준비통화는 아니다. 현재 달러가 단기간에 붕괴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이란이 보여주는 것은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패권이 아니다.

달러패권에서 완전히 승리하지 않고도 미국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미국의 제재를 받은 국가가 중국에 석유를 팔고, 위안화로 대금을 받고, 미국 금융망 밖에서 자금을 순환시키며 생존할 수 있다면 다른 국가들도 같은 경로를 검토하게 된다.

미국과 같은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아도 된다.

미국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행사하던 힘을 무력화하면 된다.

패권은 중심을 점령하지 않아도 흔들린다

과거 제국을 무너뜨리려면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의 군대를 격파해야 했다.

그러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패권은 다르다.

모든 거래를 한꺼번에 빼앗을 필요가 없다. 주변부에서 조금씩 다른 길을 만들면 된다. 제재 대상국끼리 거래하고, 원자재를 다른 통화로 결제하고, 별도의 결제망과 보험·해운 체계를 구축하면 미국 중심 질서의 배타성은 낮아진다.

미국을 정면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거치지 않는 것이다.

달러의 국제적 지위는 네트워크 효과에서 나온다. 많은 국가가 달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국가도 달러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이 원리는 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한다. 달러 이외의 거래가 누적되고 이를 지원하는 금융망이 커지면, 달러 밖에 머무르는 비용이 점차 낮아진다.

미국이 금융제재를 자주 사용할수록 제재 대상국은 대체수단을 개발할 유인을 얻는다. 연준의 연구에서도 미국의 금융제재와 지정학적 거리 확대가 각국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이 낮아지는 현상과 연관된다는 분석이 소개됐다.

미국은 달러를 무기로 사용해 상대국을 압박했다.

그러나 그 무기를 자주 사용할수록 상대국은 달러 밖의 참호를 팠다.

이것이 달러패권의 역설이다.

이란은 미국을 전쟁터로 불러냈다

이란은 미국보다 강한 국가가 아니다.

군사비도 작고 해·공군력과 첨단무기, 정보·정찰 능력에서도 미국과 비교하기 어렵다. 이란이 미국 본토를 점령하거나 미군을 정면전에서 격파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란은 미국이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군기지와 동맹국의 에너지시설을 위협하며, 중국에 석유를 팔고 위안화로 결제받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중동에 개입하지 않을 경우 감수해야 할 비용을 높인다.

미국이 대응하지 않으면 달러 제재와 동맹 보장의 신뢰가 약해진다.

대응하면 미국은 빠져나오려던 중동에 다시 병력과 무기,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이란은 미국 군대를 이기지 못해도 미국의 전략을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중동에서 비용을 줄이고 중국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란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중동의 전쟁에 들어가면 미국은 군사적으로 우세하면서도 전략적으로는 상대가 원하는 곳에 붙잡힌다.

약소국의 승리는 강대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데 있지 않다.

강대국이 원하지 않는 비용을 계속 지불하게 만드는 데 있다.

값싼 패권은 가능했는가

미국은 군대 없이 달러로 통제하고 싶었다.

동맹국의 방위비는 늘리되 동맹에 대한 지도력은 유지하고 싶었다. 중동에서 철수하되 석유 수송로와 이스라엘의 안보, 이란의 핵개발과 금융거래는 계속 통제하고 싶었다.

그러나 권한과 비용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동맹국에 안보를 약속하면 위기의 순간에 군사력을 제공해야 한다. 해상교통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선박과 항로를 지켜야 한다. 달러제재의 효과를 유지하려면 제재를 우회하는 금융기관과 국가를 계속 압박해야 한다.

미국이 이란의 위안화 석유거래를 방치한다면, 제재에 저항해도 생존할 수 있다는 선례를 인정하게 된다.

반대로 이를 막기 위해 군사력까지 사용한다면 미국은 달러가 제공했던 값싼 통제력을 지키기 위해 가장 비싼 수단을 동원하는 셈이 된다.

달러패권은 원래 군대를 사용하지 않고도 미국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게 해주는 체제였다.

그 달러패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계속 보내야 한다면 이미 체제의 효율은 떨어진 것이다.

누가 미국을 붙잡았는가

이스라엘이 미국을 붙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존과 미국의 동맹 신뢰를 연결해 미국이 쉽게 물러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란이 미국을 붙잡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과 미군기지, 에너지시장과 위안화 석유거래를 통해 미국이 외면할 수 없는 비용을 만들었다.

중국이 미국을 붙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사들이고 위안화 결제와 우회 금융망을 제공함으로써 미국의 제재가 이란을 완전히 고립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을 붙잡은 것은 미국 자신이었다.

미국은 떠나고 싶었지만 자신이 누리던 권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병력은 줄이되 동맹국은 미국을 따르기를 바랐고, 전쟁에서는 빠져나오되 석유와 해상교통은 미국의 질서에 남기를 바랐다. 직접 통치하지 않으면서도 달러와 제재를 통해 다른 국가의 행동을 결정하고 싶었다.

미국은 패권의 비용에서는 퇴장하고 싶었지만 패권의 특권에서는 퇴장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그 모순을 이용했을 뿐이다.

달러패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국과 같은 군사력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미국을 전쟁에서 이길 필요도 없었다.

미국이 군사력 없이 세계를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면 됐다.

떠나려던 미국을 붙잡은 것은 어느 한 국가가 아니다.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계속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국의 패권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