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기사로 '영끌' 다뤄놓고, 이제 와서 “어쩌나”

개그콘서트 〈그만했으면회〉에서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주인공을 찾아온 사람들이 위로와 도움은커녕 저마다 자기 이익을 챙기고 훈계하며 떠난다. 이 모습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 특히 언론의 태도와 닮아 있다. 집값이 오를 때는 영끌과 패닉바잉을 연일 기삿거리로 삼다가, 금리가 오르고 대출자들이 고통받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영끌족 어쩌나"라며 안타까워한다. 언론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사가 만들어지지만, 당사자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계속된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과 그 고통을 걱정하는 척하며 소비하는 것은 다르다. 면회객들이 자기 할 일을 마치고 떠난 뒤에도 곽범이 감옥에 남아 있듯, 기사가 끝난 뒤에도 당사자의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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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끌족 어쩌나” —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면회객

개그콘서트 〈그만했으면회〉를 보고

오늘 처음으로 개그콘서트의 〈그만했으면회〉라는 코너를 봤다. 정말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여러 에피소드를 이어서 보다 보니 단순히 황당해서 웃긴 개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교도소 면회실이다.

주인공 곽범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와 있다. 누군가 찾아와 억울함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기를 바랄 만한 처지다.

그런데 면회를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하다.

친구는 곽범의 생일을 기억한다며 감동시키더니 알고 보니 통장 비밀번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는 곽범의 차를 사고로 폐차시키고 받은 돈으로 자기 얼굴에 필러를 맞고 나타난다. 카페 동업자들은 곽범이 없는 동안 장사가 잘됐다며 은근히 그를 사업에서 밀어낸다.

권투 사범은 왜 도장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혼낸다. 감옥에 갇혀 있어서 나갈 수 없다고 설명해도 핑계 대지 말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들고 온 사람은 면회실의 투명창 너머로 음식을 내밀며 먹어보라고 한다. 곽범은 유리창 때문에 먹을 수 없는데, 상대방은 왜 먹지 않느냐며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서운해한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같은 감옥에 있다가 출소한 형도 찾아온다. 누구보다 곽범의 처지를 잘 알 사람이지만, 앞서 면회 온 사람들이 놓고 간 돈이나 물건을 슬쩍 가져간다.

면회실을 지키는 교도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썸녀가 찾아오면 곽범의 면회시간을 이용해 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모두가 자기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다.

누군가는 돈을 챙기고, 누군가는 훈계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호의를 인정받으려 한다. 심지어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조차 곽범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곽범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다 이유가 있다. 친구니까, 사범이니까, 좋은 음식을 가져왔으니까,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겪었으니까.

그들은 자기 할 말을 하고, 자기 일을 보고, 자기 만족을 얻은 뒤 면회실을 떠난다.

곽범만 그 자리에 남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잠깐 들렀다 가는 장소지만, 곽범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문득 언론에서 자주 볼 법한 제목 하나가 떠올랐다.

“영끌족 어쩌나.”

참 묘한 표현이다.

걱정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다. 마치 남의 불행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구경꾼의 탄식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2021년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던 시절을 떠올려 보자.

당시 언론에는 연일 집값 상승과 신고가 거래, 청약 경쟁률, 젊은 세대의 패닉바잉을 다룬 기사들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집을 사지 않으면 평생 뒤처질 것 같은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는 무리한 대출을 감수하면서까지 집을 샀고, 누군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언론이 집값을 올렸거나 대출을 결정하게 만들었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실제 위험을 경고한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 집을 산 사람에게 자신의 판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시장의 열기와 불안을 끊임없이 기사로 만들어 전달했던 언론이, 시장 상황이 바뀌자 이번에는 고금리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새로운 이야기로 소비하는 모습은 생각해 볼 만하다.

집값이 오르면 집값이 올라서 기사다.

집값이 떨어지면 집값이 떨어져서 기사다.

젊은 사람들이 빚을 내 집을 사면 영끌 열풍이라고 보도하고, 금리가 올라 상환 부담이 커지면 영끌족이 위기에 빠졌다고 보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한다.

“영끌족 어쩌나.”

어쩌나.

누가 어쩌라는 것인지,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참 안됐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 말이 유독 불편한 이유는 따로 있다.

몇 년 동안 시장의 열기와 불안을 실컷 기사로 다뤄놓고, 이제는 마치 자신은 그 모든 과정과 무관한 관찰자였다는 듯이 걱정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의 역할은 개인의 대출을 대신 갚아주는 것이 아니다. 금리 상승과 가계부채의 위험을 보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뤄야 할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무엇을 보도하느냐만큼이나 어떤 시선으로 보도하느냐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장기적인 부담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과, 그 사람의 불안을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것과 누군가의 어려움을 소비하는 것도 다르다.

예컨대 2021년에 4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에게 금리 상승은 단순히 올해 이자가 조금 늘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5년 뒤 금리가 바뀌고, 다시 5년 뒤 금리가 바뀐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대출을 갚아야 한다. 이미 많은 돈을 갚았는데도 원금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수 있다.

그 사이 소득과 생활비가 어떻게 변할지, 집값과 금리가 어디로 움직일지도 알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고금리는 경제기사의 제목이 아니라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돈이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반면 언론에는 새로운 제목이 생긴다.

금리가 오르면 영끌족이 걱정이고, 금리가 내려가면 영끌족의 숨통이 트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집값이 떨어지면 손실이 화제가 되고, 다시 오르면 반등이 화제가 된다.

시장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새로운 기사는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기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기사 한 편이 끝났다고 해서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만했으면회〉의 면회실이 떠오른다.

면회객들에게 곽범의 감옥 생활은 잠깐의 방문이다. 그곳에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면 밖으로 나가면 된다.

하지만 곽범에게는 그것이 삶의 전부다.

언론에는 오늘의 기삿거리지만, 당사자에게는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는 현실이다.

생각해 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게 되면 주변에서는 이런 말들이 쏟아진다.

"그렇게 무리해서 빌린 게 잘못이지."

"금리 오를 줄 몰랐어?"

"힘들면 집 팔면 되잖아."

"그러니까 미리 대비했어야지."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개인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잘못된 판단은 비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 말은 얼마나 도움이 될까.

감옥에 갇힌 곽범에게 왜 운동하러 나오지 않느냐고 묻는 권투 사범과 무엇이 다를까.

자신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 상대방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요구일 수 있다.

더 불편한 것은 어려운 사람을 향한 비판과 훈계가 때로는 그것을 하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준다는 점이다.

충고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현명했다고 느끼고,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언론은 누군가의 실패와 고통을 다시 새로운 기사로 만들 수 있다.

이용하는 사람은 이익을 얻고, 훈계하는 사람은 우월감을 얻고, 구경하는 사람은 이야깃거리를 얻는다.

그런데 정작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물론 모든 언론을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문제의 원인을 추적하고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며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보도도 많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끌족 어쩌나' 같은 표현의 태도를 더 생각하게 된다.

정말 걱정한다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당시 어떤 정보와 기대 속에 있었는지, 지금 어떤 제약에 놓여 있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집을 산 사람의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평가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이 이루어진 환경과 이후 달라진 조건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걱정과 구경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관심이 향하는 곳이 다르다.

걱정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데서 시작하고, 구경은 상대방의 처지를 이야기거리로 만드는 데서 끝난다.

〈그만했으면회〉에는 그래도 조금 다른 면회객이 한 명 등장한다.

자기 결혼식까지 포기하고 찾아온 베스트프렌드다.

물론 친구 옆 감방에 들어오겠다며 은행을 털려고 하는 바람에 또 다른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 친구 역시 정상적인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면회객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적어도 그는 곽범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니다. 친구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려는 사람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용해 나의 이익이나 만족을 얻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이해하려 하고, 그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오늘은 그저 재미있는 개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영상을 틀었다.

그런데 한참을 웃고 나니 웃음 뒤에 꽤 씁쓸한 생각이 남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곽범처럼 억울하고 무력한 처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의 면회객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면회객이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용해 이익을 챙길 수도 있고, 자신의 기준으로 훈계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척할 수도 있다.

언론 역시 그 면회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가져오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다음 기삿거리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 뒤에 남은 사람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

세상이 잔인해지는 데 반드시 특별한 악의를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그럴듯한 이유가 하나씩 있을 것이다.

면회실에 찾아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떠난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곽범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

언론도 오늘의 기사를 마감하고 나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나 기사 속에서 '어쩌나'라는 말을 듣던 사람들의 삶은 내일도 계속된다.

모두가 자기 할 일은 다 하고 떠났는데, 정작 당사자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이 오늘 본 코미디가 한참을 웃긴 뒤에도 계속 마음에 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