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을 굴복시키지 못한 미국, 호르무즈에서 멈춰 선 트럼프

미·이란 종전 MOU 이후 미국의 제재 완화와 경제지원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통제력을 핵 협상보다 중요한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예고했던 대규모 공습을 보류한 것은 미국의 군사적 패배라기보다, 이란 공격 이후 발생할 유가 급등과 걸프 동맹국에 대한 보복, 장기전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전술적 후퇴였다. 이는 미국이 이란을 굴복시키는 단계에서 이란이 만들어낸 위험을 관리하는 단계로 이동했음을 뜻하며,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반드시 정치적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패권의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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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왜 폭격 버튼에서 손을 뗐나

미·이란 MOU 붕괴와 미국 패권의 새로운 한계

지난 6월 미국과 이란이 체결한 종전 양해각서(MOU)는 언뜻 보면 이란에 지나치게 유리한 합의였다. 미국은 이란산 원유 수출을 즉시 허용하고, 동결자산 해제와 경제 재건 지원을 협상하기로 했다. 이란은 고농축 우라늄을 희석하고 핵무기를 생산하거나 취득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핵물질을 국외로 반출하지 않고 이란 국내에서 처리할 여지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합의를 미국의 일방적인 패배로만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미국이 노린 것은 이란의 완전한 파괴가 아니라 이란을 다시 관리 가능한 경제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란산 원유가 제재 면제를 받아 공식 시장으로 나오고, 동결자산이 미국의 허가 아래 해제되며, 이란의 금융거래가 다시 감시 가능한 결제망을 이용하게 된다면 미국은 전쟁 없이도 이란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MOU는 군사적 항복문서가 아니라 이란을 미국 주도의 금융·해상 질서 안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거래였다.

그러나 합의가 체결된 뒤 상황은 이 구상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MOU가 무너진 결정적 이유

MOU의 가장 큰 결함은 호르무즈 해협에 관한 문구가 의도적으로 모호했다는 데 있었다. 합의문은 이란이 60일 동안 상업 선박의 안전한 통항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통행료를 부과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미국과 걸프 국가들은 이를 단순한 자유항행 보장으로 해석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이 사실상 이란의 해협 관리권을 인정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란은 자신이 지정하지 않은 항로를 이용하는 선박에 발포했고, 미국은 이를 항행의 자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경제적 약속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란이 기대했던 동결자산 해제와 재건 자금은 가시화되지 않았고, 미국은 유조선 피격 사건을 이유로 7월 7일 이란산 원유에 대한 제재 면제를 철회했다. 60일 동안 유지하기로 했던 면제가 보름여 만에 사실상 뒤집힌 것이다.

이란의 입장에서 MOU는 핵과 해협에서 일정한 양보를 했지만 실질적인 경제적 대가는 받지 못한 합의가 됐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란이 해협 통제권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합의의 핵심인 자유항행을 훼손한 셈이었다.

결국 양측은 똑같은 문서에 서명하고도 전혀 다른 합의에 서명했다고 믿었다.

핵보다 중요해진 호르무즈

MOU 이후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협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호르무즈 해협이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란은 재래식 군사력으로 미국을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란의 군사시설과 지휘부, 미사일 기지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란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거나 미군을 정면으로 격파할 필요가 없다.

호르무즈 해협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유조선과 상선을 위협하며, 걸프 지역의 에너지 시설과 미군기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 전쟁의 비용을 미국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유럽과 아시아의 원유 수입국에 분산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이란 지도부는 호르무즈 해협을 자신들의 ‘황금 무기’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란은 MOU의 모호한 문구를 근거로 해협의 관리권을 제도화하려 했고, 핵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협상보다 해협 통제권 인정을 우선시했다.

이것은 이란 전략의 중대한 전환이다.

과거 이란의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는 우라늄 농축 능력이었다. 이제는 세계 에너지 공급망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지리적 위치가 핵 프로그램보다 즉각적이고 강력한 협상 수단이 됐다.

트럼프의 공습 취소는 전술적 후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공습을 예고한 뒤 이를 전격 취소했다. 표면적으로는 이란과 중동 국가들이 협상을 위한 시간을 요청했고, 호르무즈 해협 개방과 이란 핵 위협 종식을 포함하는 합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결정 직전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와 긴장 완화를 우선해달라고 요청했다. 전쟁이 확대되면 이란의 보복은 미국 본토가 아니라 사우디와 걸프 국가들의 원유시설, 항만, 공항과 미군기지를 향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공습 취소는 단순한 변덕이 아니다. 미국이 대규모 공격으로 이란에 더 큰 피해를 줄 능력은 있지만, 공격 이후 발생할 정치적·경제적 결과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분명한 전술적 후퇴다.

그러나 전술적 후퇴가 곧 군사적 패배나 항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공격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란의 핵·미사일 시설을 추가로 파괴할 수 있다. 문제는 폭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성과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시설을 파괴하는 것과 상대방에게 원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이 드러낸 네 가지 한계

첫째, 미국은 전투에서는 우세하지만 전쟁의 종결 조건을 강제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이란의 주요 시설을 타격할 수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영구적으로 안전하게 만들거나, 이란의 미사일과 대리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친미 정권을 수립할 현실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다. 8월 초까지도 트럼프가 내세웠던 핵 프로그램 해체와 이란의 지역 공격 능력 제거라는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둘째, 걸프 국가들이 미국의 전쟁에 사실상의 거부권을 갖게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오만은 단순한 미국의 하위 동맹국이 아니다. 이들은 이란의 보복을 직접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미국이 공격을 결정하더라도 걸프 국가들이 영공과 기지 사용을 제한하거나 정치적으로 반대하면 작전의 비용과 위험은 급격히 높아진다.

미국은 중동 질서를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패권국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 국가들을 조정해야 하는 중재자로 이동하고 있다.

셋째, 이란은 미국의 국내 정치와 세계 경제를 공격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와 불안정은 국제유가와 물가를 끌어올린다. 유가 상승은 미국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고 트럼프 행정부의 국내 정치 부담으로 돌아온다. 실제로 전쟁과 해협 봉쇄에 따른 경제적 고통은 트럼프에게 조기 종전 방안을 찾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란은 미군을 격파하지 않아도 된다. 미국 국민이 전쟁의 비용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넷째,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다른 전략 전선을 약화시킨다.

미군은 이란전에서 상당량의 장거리 정밀 미사일을 소모했으며, 향후 다른 지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한 군사 준비태세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중국에 간접적인 전략적 이익을 준다. 중국 역시 높은 유가와 중동 불안정을 원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군사 자산과 정치적 관심이 중동에 묶이는 상황은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이 받는 압박을 줄여준다.

후퇴가 이란 강경파에 준 신호

트럼프의 공습 취소는 이란 내부 정치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란의 협상파는 제재 완화와 동결자산 해제 같은 실질적인 경제적 보상을 얻어야 대화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MOU 이후 약속된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미국이 다시 제재와 공습을 선택하자, 이란 강경파는 “미국은 합의를 지키지 않으며 오직 힘만 이해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이란 내부에서는 이미 군사적 압박을 통해 미국을 협상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반면 협상파는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해 최종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공습을 위협하던 트럼프가 호르무즈 해협과 걸프 국가들의 압박 때문에 한발 물러났다는 인식이 굳어진다면 강경파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다음 협상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이란은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더 큰 군사적·경제적 압박을 가해야 미국의 양보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미국은 그런 행동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제재와 공격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 결과 양측은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면서도 협상 직전마다 충돌을 확대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달러패권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신뢰를 잃었다

이번 사태를 곧바로 달러패권의 붕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

미국은 여전히 이란 원유의 합법적 판매 여부를 결정하고, 은행·보험·해운회사의 거래를 허가하거나 차단할 수 있다. 미국이 원유 제재 면제를 발표하자 이란은 즉시 국제시장에 복귀할 수 있었고, 면제를 취소하자 다시 수출과 금융거래가 제약을 받았다.

이는 달러와 미국 금융제재의 힘이 여전히 크다는 증거다.

다만 미국이 MOU에서 약속한 제재 완화와 자산 해제를 실제로 제공하지 못하거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번복한다면, 미국이 제시하는 경제적 보상의 신뢰도는 떨어진다.

상대국은 합의문보다 실제 현금과 원유 수출이 먼저 보장돼야 양보하겠다고 요구하게 된다. 중국과의 위안화 결제, 비공식 해운망, 제재 우회 거래도 보험 수단으로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다.

달러패권의 가장 큰 손상은 달러가 사용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약속한 달러 접근권의 가치가 의심받기 시작하는 데서 온다.

대규모 담판에서 단계적 거래로

트럼프는 한 번의 압도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호르무즈 해협 개방, 비핵화, 미사일 제한과 지역질서 재편을 동시에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협상의 형태는 그와 다르다.

이란은 미국과 직접 협상하고 있다는 주장 자체를 부인하며 오만과 해협 통항 문제만 협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타르·파키스탄·오만이 양측의 제안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미국 역시 우선 호르무즈 해협 문제를 해결한 뒤 핵 문제를 다루는 단계적 접근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이 추진했던 거대한 일괄타결이 사실상 무너지고, 당장 유조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임시 항로와 관리방식을 정하는 위기관리 협상으로 축소된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의 전술적 후퇴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다.

미국은 이란을 굴복시키는 협상에서, 이란이 만들어낸 위험을 관리하는 협상으로 이동했다.

승자는 아직 없다

이란이 미국을 완전히 굴복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은 전쟁으로 막대한 군사적·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상승, 내부 정치 갈등을 겪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계속 봉쇄하면 중국을 포함한 주요 원유 수입국과 걸프 국가들까지 적으로 돌릴 수 있다.

미국 역시 패배한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이란에 훨씬 더 큰 군사적 피해를 줄 수 있고, 금융제재와 해상봉쇄를 통해 이란 경제를 압박할 수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강요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이란은 미국을 이길 수 없지만 미국이 승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란을 파괴할 수 있지만 파괴 이후 원하는 질서를 세울 수 없다.

따라서 트럼프의 공습 취소는 단순한 유약함도, 완전한 항복도 아니다. 군사적 우위가 자동으로 정치적 승리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선택이다.

미국 패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의 적들이 미국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도 에너지 가격, 해상교통, 동맹국의 불안과 미국 국내정치를 연결해 미국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트럼프가 폭격 버튼에서 손을 뗀 순간 확인된 것은 이란의 승리가 아니라 미국 힘의 새로운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