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비용을 인정하기 시작한 트럼프, 시간을 샀더니 이자가 붙었다
지난 6월 미국과 이란의 MOU는 전쟁을 끝낸 문서가 아니라 핵, 호르무즈, 제재, 원유, 해상질서라는 서로 충돌하는 문제들을 60일 뒤로 미뤄둔 문서였다. 당시에는 시간을 산 임시봉합처럼 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현재의 교착과 비용을 모두 품고 있던 압축파일에 가까웠다. 호르무즈 통제권을 둘러싼 충돌은 계속되고 유가는 미국 국내정치의 부담으로 돌아왔으며, 결국 트럼프는 미국인들에게 더 높은 기름값을 감수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MOU 이후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MOU 안에 들어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씩 압축이 풀렸을 뿐이다. 특히 전쟁 비용을 국민에게 정당화하기 시작한 순간 트럼프는 오히려 더 큰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았고, 이는 향후 이란과의 타협과 전쟁의 출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드디어 트럼프가 유가를 감수하라고 말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미국인들이 조금 더 높은 휘발유 가격을 부담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약 4.08달러다. 1년 전보다 29%가량 높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제 이 가격을 곧 해결될 일시적 부작용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란을 막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으로 설명한다.
나는 이 발언을 듣고 지난 6월의 MOU가 다시 생각났다.
당시 나는 그 MOU를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표현했다.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당장의 충돌을 멈추고 시간을 산 문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조금 다르게 보인다.
MOU는 시간을 산 문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미리 품고 있던 압축파일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지금의 문제가 거의 다 들어 있었다.
호르무즈가 들어 있었고,
이란의 원유가 들어 있었고,
경제제재와 동결자산이 들어 있었고,
핵 문제가 들어 있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 차이가 들어 있었고,
무엇보다 이 전쟁의 비용을 결국 누가 부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들어 있었다.
다만 6월에는 그것들이 하나의 MOU라는 파일 안에 압축돼 있었을 뿐이다.
압축률이 높았던 것이다.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6월 당시 미국과 이란이 마련한 Islamabad MOU는 60일 동안 최종 합의를 협상하는 구조였다. 미국은 해상봉쇄를 단계적으로 풀고, 이란은 호르무즈를 통한 안전통항을 보장하며, 제재와 동결자산, 핵 문제 등을 후속 협상에서 풀기로 했다.
당시만 보면 절묘한 타협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미국은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
호르무즈가 열리면 유가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란 핵 문제는 60일 동안 다시 협상하면 됐다.
이란에는 원유 판매의 숨통을 열어주고 동결자산 문제도 풀어주면서 협상장에 묶어둘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후 60일간 이란 원유와 관련한 제재를 일부 면제했다.
문제는 그 각각의 문장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원하는 호르무즈는 자유롭게 통항할 수 있는 호르무즈였다.
이란이 원하는 호르무즈는 자신이 관리권을 행사하는 호르무즈였다.
미국이 원하는 제재 완화는 이란을 관리 가능한 국제질서 안으로 다시 넣는 수단이었다.
이란이 원하는 제재 완화는 전쟁 이전보다 나은 경제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핵 문제를 다시 통제하고 싶었다.
이스라엘은 핵만으로는 부족했다.
미사일과 드론, 대리세력까지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이란은 체제를 유지하고 미사일이라는 핵심 억지력을 보존해야 했다.
어느 하나도 해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일단 MOU 안에서는 모두 해결 가능한 문제처럼 접어 넣었다.
그리고 60일이라는 시간을 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바로 그 60일이 압축파일의 해제 과정이었다.
하나씩 파일이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이 호르무즈였다.
6월부터 이미 이상한 대목은 있었다.
MOU는 이란이 호르무즈 항행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자 미국은 곧바로 선을 그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란이 호르무즈를 지나는 선박에 통행료를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자유항행은 국제질서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문제의 본질은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호르무즈를 관리하는가.
이란이 관리하는데 통행료는 받지 못하는 것인가.
미국이 자유항행을 보장한다면 그 군사적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이란이 항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미국은 그것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반대로 미국이 이란의 관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란이 순순히 호르무즈라는 가장 강력한 협상카드를 내려놓을 이유가 있는가.
MOU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냥 나중에 답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8월의 이란은 호르무즈가 이란의 통제 아래에서만 다시 열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이 호르무즈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쪽은 우리가 관리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도 우리가 관리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것은 단순한 항행 문제가 아니다.
주권과 질서의 문제다.
그래서 급기야 트럼프는 호르무즈를 미국 영토로 선언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얼핏 황당한 발언처럼 보이지만 나는 오히려 이 발언이 지금 미국이 처한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호르무즈가 단순히 열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면 이런 말까지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란이 “우리의 관리 아래 열겠다”고 나온 순간 미국이 원하는 자유항행과 이란이 원하는 관리권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국이 이란의 관리권을 인정하면 이란이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미국이 직접 호르무즈의 자유항행을 군사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그러면 비용이 생긴다.
그 비용은 구축함과 항공모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험료가 되고,
운송비가 되고,
원유 가격이 되고,
결국 미국 주유소의 숫자가 된다.
6월 MOU에서 가장 먼저 해결하려 했던 문제가 유가였다.
호르무즈를 열고 이란 원유를 다시 시장으로 보내면 국제유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당시 예비 합의 소식이 전해지자 실제로 국제유가는 크게 떨어졌다.
그런데 두 달 뒤 결과는 정반대다.
호르무즈 통항량은 전쟁 전 하루 130~140척 수준에서 최근 한 자릿수까지 줄어들었다.
미국은 이란에 대한 해상봉쇄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이란은 호르무즈를 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트럼프가 이제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름값을 감수해 달라고.
여기서 나는 이번 발언이 중요하다고 본다.
기름값이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트럼프의 언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 트럼프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이랬다.
우리가 이길 것이다.
호르무즈를 열 것이다.
유가는 내려갈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신 왜 높은 가격을 참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상당히 큰 변화다.
정치인이 비용을 없애겠다고 말하는 단계와 비용을 정당화하는 단계는 다르다.
비용을 없애겠다고 할 때는 아직 결과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비용을 감수하라고 할 때는 그 비용이 당분간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발언은 전쟁의 상황을 보여주는 일종의 신호다.
트럼프가 약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트럼프가 이 전쟁에서 얼마나 빠져나오기 어려워졌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난 6월 MOU 당시 내가 정리했던 미국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국내정치였다.
미국이 왜 이 전쟁을 해야 하는지를 미국 국민에게 달러패권이나 해상질서 같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세계의 자유항행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의 기름값이 올라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통령은 선거에서 곤란해진다.
그래서 전쟁에는 다른 명분이 필요하다.
이란의 핵무기를 막는다.
미국을 안전하게 만든다.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
그리고 지금 트럼프가 높은 유가를 설명하면서 정확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미국이 전 세계를 위해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6월에는 표 안에 한 줄로 들어 있던 문제가 두 달 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셈이다.
당시 미국의 딜레마는 단순했다.
미국 중심의 해상질서를 유지하려면 자유항행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유항행을 실제로 보장하려면 미국이 군사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이란이 호르무즈에 실질적인 관리권을 행사하게 두면 비용은 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미국이 만들어온 해상질서의 원칙이 흔들린다.
미국이 관리하면 돈이 든다.
이란이 관리하면 권위를 잃는다.
이것이 MOU 안에 들어 있던 가장 큰 모순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돈을 내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그 계산서가 결국 미국 국민에게 전달되고 있다.
갤런당 4.08달러의 형태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6월 MOU를 보면 꽤 다르게 보인다.
당시에는 실패한 평화협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오히려 실패라기보다 너무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한 문서 안에 넣어둔 협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핵도 넣었다.
호르무즈도 넣었다.
제재도 넣었다.
동결자산도 넣었다.
이란 원유도 넣었다.
전후 질서도 넣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각자의 해석만 넣었다.
미국은 미국이 원하는 MOU를 읽었고,
이란은 이란이 원하는 MOU를 읽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모두 60일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압축파일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파일 용량은 작아졌지만 내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압축이 풀렸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안에서 나온 파일들을 보고 있다.
호르무즈 관리권.
해상봉쇄.
제재.
동결자산.
전쟁배상.
핵사찰.
미사일.
원유.
유가.
그리고 미국 국내정치.
놀라운 것은 새로운 문제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거의 전부 6월에 이미 존재했던 문제다.
MOU 이후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MOU 안에 문제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MOU가 실패한 뒤 우연히 발생한 새로운 국면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MOU가 품고 있던 모순이 순서대로 현실에 나타나는 과정에 더 가깝다.
나는 당시 MOU가 미국에게 시간을 벌어줬다고 썼다.
그 판단은 여전히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미국이 시간을 산 만큼 문제도 미래로 넘겼다.
그리고 문제를 미래로 넘길 때는 이자가 붙는다.
6월에 호르무즈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은 대가는 지금 해상봉쇄와 항행 충돌로 돌아왔다.
6월에 이란의 관리권을 애매하게 남겨둔 대가는 지금 미국과 이란이 서로 호르무즈를 통제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으로 돌아왔다.
6월에 전쟁의 최종 목표를 정리하지 못한 대가는 지금도 무엇을 얻어야 전쟁을 끝낼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가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룬 대가는 결국 미국 국민의 주유비로 돌아왔다.
그래서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조금 더 비싼 기름값을 감수해 달라.”
단순한 유가 발언이 아니다.
6월의 MOU가 압축을 풀면서 마지막에 나온 파일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정치적으로 위험한 파일이다.
전쟁이 멀리 있을 때 국민은 지도를 본다.
전쟁이 가까워지면 주유소 가격표를 본다.
전쟁의 비용이 세금이나 국방예산에 숨어 있을 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매주 차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비용을 확인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유가는 단순한 경제지표가 아니다.
전쟁의 국내정치적 시계다.
트럼프가 결국 그 시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곧 내려간다”가 아니라 “감수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나는 얼마 전 「트럼프 임기 내에는 안 끝난다」라는 글에서 트럼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에게 양보하면서도 자신이 이겼다고 설명할 수 있는 합의라고 썼다.
지금도 생각은 같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높은 유가를 이란을 막기 위해 치르는 정당한 비용이라고 규정하면 할수록 이란과 타협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한 다음에는 그 희생에 맞는 결과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높은 기름값까지 참았는데 이란의 체제는 그대로이고,
핵 문제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호르무즈에서는 이란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제재까지 풀어준다면,
그때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비용을 지불했는가.
그래서 전쟁의 비용을 정당화하는 말은 당장은 트럼프를 방어해주지만 장기적으로는 그의 퇴로를 더 좁힐 수도 있다.
비용을 인정하는 순간 성과의 기준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6월의 MOU가 그랬다.
그때는 일단 전쟁을 멈추는 것으로 충분했다.
60일 동안 최종 합의를 만들면 됐다.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이미 새로운 비용이 쌓였다.
새로운 요구가 붙었다.
새로운 피해가 생겼다.
그리고 서로에게 받아내야 할 것이 더 많아졌다.
시간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문제의 압축을 풀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면 MOU는 꽤 정확한 문서였다.
평화를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 이후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를 거의 전부 품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60일 뒤의 미래를 압축해 놓은 파일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고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파일명이 유가였다.
드디어 트럼프가 그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말했다.
이 비용은 당신들도 감수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