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담대 6% 시대, 고통과 파탄은 구분해야 한다
금리 상승과 거래 위축은 분명 사람의 삶을 압박하지만, 이를 곧바로 ‘곡소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도하다. 우리는 탈세계화와 공급망 불안이 본격화되고, 역사적으로 이례적이었던 초저금리 시대를 지나 다시 평범한 수준의 금리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다. 대출이 많거나 거래가 막힌 사람에게 몇 년의 정체는 삶이 잠식되는 듯한 고통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조정하고 기다리고 다시 계획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시간이다. 경제 보도는 고통을 축소할 필요도 없지만, 파탄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언어로 과장할 필요도 없다. 이자 부담은 이자 부담으로, 거래절벽은 거래절벽으로 정확히 표현해야 하며, ‘곡소리’라는 말은 정말 곡할 일이 있을 때 남겨두는 편이 낫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다시 오르고 있다.
9월 중순 기준 5대 시중은행의 5년 고정형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4.95~6.91%까지 올라왔다. 신한은행을 제외하면 금리 하단마저 5%대로 들어섰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가 5%를 넘어선 가운데 국내 국고채와 금융채 금리도 상승했고, 고정형 주담대의 기준이 되는 은행채 5년물 금리는 약 3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에서는 더 직접적인 변화가 있었다. 9월 16일 연방준비제도는 기준금리 목표 범위를 0.25%포인트 올려 3.75~4.00%로 결정했다.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준 위원들의 경제전망에서 올해 말 적정 기준금리 중간값은 4.1%로 제시됐다. 현재 금리 범위의 중간값보다 높은 수준이어서 올해 남은 10월과 12월 회의에서 추가 인상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열려 있다.
금리가 오른다.
대출을 받은 사람에게 좋은 소식일 리 없다. 몇 억원의 대출을 가지고 있다면 금리 1%포인트의 차이도 한 해 수백만원의 지출 차이를 만든다. 집을 사려는 사람은 대출 가능액이 줄고, 집을 팔려는 사람은 매수자가 사라진 시장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뉴스의 제목에 자주 따라붙는 표현이 있다.
‘영끌족 곡소리.’
나는 이 표현만큼은 조금 아껴 썼으면 한다.
사람은 수명이 있는 동물이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특별하게 다뤄왔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울고, 그 울음을 우리는 오랫동안 곡(哭)이라고 불렀다. 곡소리는 원래 그런 자리에서 나는 소리다.
물론 언어는 시대에 따라 의미가 확장된다. 사업이 어렵거나 주가가 급락했을 때 ‘곡소리가 난다’고 표현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마다 굳이 가장 비극적인 단어를 꺼낼 필요가 있는지는 생각해볼 만하다.
지금 금리가 오르는 데에는 나름의 시대적 배경이 있다.
우리는 아주 특이한 시기를 통과했다. 세계화가 생산비용을 낮췄고, 세계 곳곳에 구축된 공급망은 값싼 상품을 끊임없이 공급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주요국의 금리는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수준까지 내려갔다.
한동안 돈을 빌리는 비용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정상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이제 세계화의 방향은 달라지고 있다. 경제안보가 중요해지고, 기업들은 가장 싼 곳보다는 조금 비싸더라도 안전한 곳에 공장을 지으려 한다. 공급망의 효율성보다 안정성이 중요해지고 있다. 지정학적 충돌은 에너지와 운송 비용을 흔든다.
탈세계화와 공급망 불안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물건을 가장 싸게 만드는 것보다 필요한 순간에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세상이라면 그만큼 비용이 든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결국 물가와 금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환경에서 우리가 지난 몇 년의 초저금리만을 기준점으로 삼아 앞으로의 금리를 바라본다면 모든 금리가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금리가 낮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출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5%, 6%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충분히 부담스럽다. 그러나 조금 더 긴 시간축을 놓고 보면 인류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높은 금리에서도 경제생활을 해왔던 시기는 적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통과한 초저금리 시대가 특별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경제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다르다.
경제사는 10년을 하나의 사이클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10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다.
40대에 집을 산 사람이 거래절벽 속에서 5년을 보내면 어느새 50대가 된다. 은퇴를 앞두고 집을 정리하려던 사람이 몇 년 동안 거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통계상의 ‘거래량 감소’가 아니다.
삶의 계획이 멈추는 것이다.
집을 팔아 이사하려 했던 사람은 움직이지 못한다. 자녀에게 자금을 나눠주려던 계획도 미뤄진다. 은퇴 후 자산 구성을 바꾸려던 사람 역시 기다려야 한다.
시장이 정상화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삶 일부가 함께 정지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사람에게 남은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금리 상승의 고통을 가볍게 말하고 싶지 않다. 거래절벽을 단순한 숫자로 취급하고 싶지도 않다. 이자가 늘어 생활비를 줄여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산을 처분하지 못해 인생 계획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죽음은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어려움이다.
기다릴 수도 있고, 갚을 수도 있고, 자산을 다시 배분할 수도 있고,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다. 때로는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몇 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경제 기사에서 ‘곡소리’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자가 올랐다면 이자 부담이 커졌다고 말하면 된다.
주택 거래가 끊겼다면 거래절벽이라고 하면 된다.
대출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구가 실제로 늘어난다면 연체율과 부실 규모를 보여주면 된다.
가처분소득이 줄었다면 얼마만큼 줄었는지 설명하면 된다.
그렇게 말해도 현실의 어려움은 충분히 전달된다.
오히려 그것이 더 정확하다.
‘곡소리’라는 표현은 이 모든 설명을 건너뛴다. 누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떤 경로로 어려워지는지 설명하기 전에 이미 결론부터 비극으로 만들어 버린다.
금리는 다시 오를 수도 있고 언젠가는 다시 내려갈 수도 있다. 집값도 오르고 내린다. 거래가 활발해질 때도 있고 얼어붙을 때도 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돈을 잃고, 누군가는 계획했던 시간을 잃는다.
그 고통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을 존중하는 것과 고통을 가장 자극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
삶이 어려워졌다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이 그 사람의 고통을 더 진지하게 다루는 방법이다.
미국이 다시 금리를 올렸고 우리나라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올라가고 있다.
분명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꽤 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의 어려움과 삶의 끝을 구분하는 언어 역시 필요하다.
거래가 되지 않아 삶이 잠식되는 기분이 들 수 있다.
이자가 늘어나 하루하루가 힘겨울 수도 있다.
그것은 힘든 것이다.
죽음은 아니다.
그러니 ‘곡소리’라는 말만큼은 정말 곡할 일이 있을 때를 위해 조금 남겨두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