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정통론으로 시아파를 이해할 수 있을까
촉한과 조위의 대립은 단순한 삼국 간 패권 경쟁이 아니라 ‘한나라의 정통을 누가 계승했는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조위는 헌제의 선양과 새로운 왕조 질서를 근거로 정통성을 주장했고, 촉한은 유씨 황통과 한실 계승을 내세워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이런 구조는 무함마드 사후의 정통 계승을 둘러싼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화와 얼핏 닮아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왕조 정통론에서는 최종적인 정치적 승리와 통일이 후대의 정통성을 크게 좌우한 반면, 시아파에서는 정치적 패배와 순교가 오히려 정통성의 기억과 종교적 의미를 강화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결국 두 사례의 비교는 ‘누가 정통인가’라는 공통된 질문에서 시작하지만, 패배한 정통성을 역사와 공동체가 어떻게 기억하는가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드러낸다.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익숙한 구도 가운데 하나는 위·촉·오의 패권 경쟁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위와 촉한의 대립은 단순히 어느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느냐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한나라의 정통은 누구에게 있는가.
220년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조위의 논리는 명료했다. 한의 황제가 스스로 제위를 넘겼고, 새로운 천명이 위에 내려왔으므로 한은 끝나고 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유비의 논리는 전혀 달랐다. 그는 한 경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유씨 종친이었고, 자신이 세운 나라의 국호 역시 ‘촉’이 아니라 ‘한’이었다. 우리가 편의상 촉한이라 부를 뿐이다. 촉한의 입장에서 조비의 선양은 정상적인 왕조 교체가 아니라 찬탈이었다. 따라서 한은 정당하게 끝난 적이 없었다. 자신들은 새로운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무너진 한실을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두 정권은 이 차이를 말로만 주장하지 않았다. 조위는 새로운 왕조의 성립에 맞춰 덕운과 정삭을 새롭게 해석하며 ‘한과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제도와 상징으로 드러냈다. 반대로 촉한은 한의 계승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역법과 연호, 국호와 국가 의례는 당시에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천하의 시간이 누구의 것인가”를 선언하는 정치적 언어였다.
이 구조를 보고 있으면 이슬람 세계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떠오른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 역시 누가 정당한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갈라졌다. 아주 거칠게 단순화한다면 한쪽에는 공동체 안에서 현실적으로 성립한 칼리프의 계승질서를 중시하는 흐름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알리와 예언자 가문에 특별한 계승의 정당성이 있다고 보는 흐름이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조위와 촉한의 관계와 놀랍도록 비슷하게 보인다.
조위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권력이 이전되었고, 전 황제가 그것을 승인했다. 새로운 질서가 이미 성립했다.”
촉한은 반대로 묻는다.
“그 절차가 성립했다고 해서 본래의 정통성까지 넘어간 것인가.”
혈통과 계승, 현실의 권력과 명분 사이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두 사례를 나란히 놓아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이 비유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중국의 왕조 정통론에서는 결국 승패가 대단히 중요하다.
왕망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지만 유수가 다시 천하를 통일했기 때문에 우리는 유수가 새로운 유씨 왕조를 창업했다고 말하기보다 ‘한을 중흥한 광무제’라고 부른다. 왕망의 신은 한과 한 사이에 잠시 존재했던 왕조가 되었다.
유비에게도 비슷한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제갈량의 북벌이 성공하고 촉한이 조위를 멸망시킨 뒤 천하를 통일했다면 오늘날의 중국 왕조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조위는 왕망의 신처럼 한때 한의 황위를 찬탈했던 정권이 되고, 유비는 광무제에 이어 한을 다시 일으킨 중흥군주로 평가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세계에서는 우리가 지금 ‘후한’이라고 부르는 왕조와 유비 이후의 한을 구분하기 위해 전한·중한·후한, 혹은 서한·동한·계한 같은 명칭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역시 헌제 유협이 아니라 다른 유아무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촉한이 패배했다.
263년 유선이 위에 항복했고, 이후 위의 황통은 다시 진으로 넘어갔다. 진은 중국을 통일했다. 결국 후대 왕조사의 기본 골격은 한에서 위로, 위에서 진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되었다. 유비와 유선은 ‘한 황제’의 연속선에서 떨어져 나와 ‘촉한의 군주’가 되었다.
이 점에서 중국의 정통론은 상당히 결과론적이다.
명분은 중요하지만 명분만으로는 부족하다. 혈통도 중요하지만 혈통만으로 왕조사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결국 살아남아 천하를 지배한 세력이 자신들의 계승 논리를 역사적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시아파의 역사적 기억은 여기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시아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카르발라의 비극을 생각해보면 그 차이가 선명하다. 후세인은 정치적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그는 패배했고 죽었다.
중국식 왕조 정통론의 감각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정통성 경쟁에서 결정적인 실패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아적 기억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당한 권위를 가진 자가 세속 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 패배가 도덕적 패배를 뜻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희생이 정통성의 기억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촉한과 시아파의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촉한이 멸망하자 촉한정통론은 역사학과 정치철학의 논쟁으로 남았다. 후대 사람들이 유비와 제갈량에게 감정적으로 깊이 공감하고 촉한의 정통을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독립적인 종교공동체의 세계관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유비의 패배에는 역사적 비극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패배 그 자체가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반면 시아파에서 알리와 후세인, 그리고 이맘의 문제는 단순히 어느 왕조가 정통이었느냐는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적 권위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정의와 불의는 무엇인가, 고난과 희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문제와 결합했다.
때문에 외부인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단순히 “이슬람판 왕위계승전쟁”으로 이해하려 하면 어느 순간 이해의 한계에 부딪힌다.
처음의 정치적 갈등은 설명할 수 있다.
누가 무함마드의 공동체를 계승할 것인가.
누가 정당한 지도자인가.
혈통인가, 공동체의 승인인가.
여기까지는 중국사의 수많은 왕위계승과 정통론을 통해 어느 정도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치적 갈등이 수백 년을 거치며 신학과 의례, 공동체의 기억과 종교적 정체성 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국의 왕조사에서는 최종 승자가 정통성을 재구성하는 힘을 가진다.
하지만 시아적 역사관에서는 때때로 패배자가 살아남는다.
국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의례 속에서 살아남으며, 공동체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 살아남는다.
그래서 촉한과 조위의 관계를 수니파와 시아파에 비교하는 것은 분명 흥미롭다. 두 사례 모두 “정당한 계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교가 정말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두 사례가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닮지 않는 지점을 발견했을 때다.
중국의 정통론에서 패배한 왕조는 후대 역사학자에게 재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시아적 세계관에서는 패배한 정통이 반드시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두 세계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쪽에서 역사는 승자가 정통성을 완성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패배와 희생조차 정통성을 끝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