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은 마법이 아니다: 30년 만에 못 살 집을 또 짓는 이유
30년 된 아파트가 누수와 주차 문제로 정말 살기 힘든 상태라면 그것이 바로 그 자산의 현재 모습이다. 그런 집을 새 아파트로 바꾸려면 당연히 비용이 들며, 재건축은 그 비용을 없애주는 마법이 아니다. 재건축 과정에서 추가 가치가 생길 수는 있지만 분담금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가치만으로 전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고, 부족한 부분은 현금과 대출, 그리고 용적률 확대를 통한 기존 토지 가치의 활용으로 충당된다. 그런데 30년 뒤 새 아파트도 다시 낡는다면 그때도 또 분담금을 내고, 또 용적률을 높이고, 또 대지지분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눌 것인가. 집값은 소득으로 따라가기 어려운데 30년마다 집 한 채를 다시 지어야 한다면, 우리는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달팽이처럼 평생 집을 등에 지고 사는 셈이다.
최근 1기 신도시 재건축 이야기를 보면 비슷한 인터뷰가 반복된다.
“30년이 넘으니 누수가 심하다.”
“주차가 부족해서 삶의 질이 떨어진다.”
“이제는 살기 힘든 주거환경이다.”
나는 사실 이런 인터뷰를 들으면 조금 의아하다.
30년 된 아파트에 누수가 생기고 주차가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한다. 1990년대 초반에 지어진 집은 지금과 자동차 보유 수준도 달랐고, 단열이나 설비에 대한 기준도 달랐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지금의 집이 ‘살기 힘든 주거환경’이라면, 그 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확인해준다.
그것이 바로 지금 그 자산의 현재 스코어라는 것이다.
누수가 있고, 주차가 어렵고, 시설이 낡고, 생활이 불편한 집.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집이다.
지금 이 상태로 시장에 판다면 당연히 그 노후도와 불편함이 반영된 값을 받아야 한다. 반대로 누수도 없고, 주차도 편하고, 단열도 좋고, 배관과 엘리베이터가 새것인 집을 가지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비용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재건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이 당연한 이야기가 종종 사라진다.
현재의 낡은 집에서 출발해서 몇 년 뒤 새 아파트가 생기는 장면만 남는다.
하지만 낡은 집이 저절로 새 집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재건축은 마법이 아니다.
살기 힘든 집을 살기 좋은 집으로 바꾸었다면, 그 차이는 누군가가 반드시 지불한 것이다.
자기 돈으로 새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는 재건축 이야기를 들을 때 이런 질문부터 해보고 싶다.
30년 동안 사용한 집을 자기 돈만으로 다시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집은 아주 비싼 자본재다.
자동차는 10년이나 15년을 타고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자동차 한 대를 교체하기 위해 평생 벌어들인 소득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지는 않는다.
집은 다르다.
한 채를 마련하는 데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이 들어간다.
그런 자산을 30년 사용했더니 이제 못 살겠다고 한다.
그래서 철거하고 다시 짓는다.
그렇다면 그 비용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모아둔 현금을 넣을 수 있다.
돈이 부족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가진 토지의 가치를 활용할 수 있다. 용적률을 높여 더 많은 집을 짓고 새로운 소유자를 받아들인다. 그들이 내는 분양대금으로 공사비의 일부를 충당한다.
재건축의 사업구조를 아주 거칠게 압축하면 결국 이것이다.
현금 + 대출 + 기존 토지 가치의 활용 + 재건축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추가 가치.
이것들이 모여 새 집을 만든다.
개발이익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
재건축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개발이익’이다.
용적률을 올리면 개발이익이 커진다고 한다.
일반분양을 많이 하면 사업성이 좋아진다고 한다.
이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재건축에는 분명 추가 가치가 발생할 수 있다.
토지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오래된 건물을 새 건물로 바꾸면서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추가 가치의 크기다.
재건축에는 분명 추가 가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담금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추가 가치가 재건축에 필요한 전체 부담을 없애줄 정도의 순수한 잉여는 아니라는 뜻이다. 부족한 부분은 현금, 대출, 그리고 기존 토지 가치의 활용으로 충당된다.
그래서 나는 ‘개발이익’이라는 단어가 재건축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사용되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다.
정말 개발이익만으로 새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존 주민은 자기 돈을 넣을 필요도 없다.
빚을 낼 필요도 없다.
더 많은 사람에게 토지지분을 나눠줄 필요도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분담금이 나온다.
대출을 고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 용적률을 더 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이야기는 끝난 셈이다.
개발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새 집을 만드는 비용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결국 내가 가진 다른 자원으로 부담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그중 ‘개발이익’만 크게 이야기한다.
지금 집의 가격이 왜 중요한가
여기서 재건축 후 새 아파트의 가격을 가지고 이야기를 돌릴 필요도 없다.
논점은 그것이 아니다.
현재 집이 정말 인터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기 힘든 수준이라면, 그것이 지금의 자산 상태다.
낡은 집은 낡은 집이다.
그리고 좋은 집을 원한다면 돈을 들여 좋은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래된 자동차를 1천만 원에 팔고 새 자동차를 5천만 원에 샀다고 해서 4천만 원의 개발이익이 생긴 것이 아니다.
새것을 얻기 위해 추가 자원을 투입한 것이다.
주택은 더 복잡하다.
현금만 투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토지의 일부 가치까지 사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재건축 전후의 아파트 가격만 비교하는 것은 중요한 것을 놓친다.
중요한 것은 새 집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넣었느냐이다.
주차가 부족하다면서 용적률은 또 높여야 한다
그리고 재건축 인터뷰를 들으며 특히 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주차 문제다.
주차장이 부족해서 너무 불편하다고 한다.
주차 때문에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아파트는 지금의 자동차 보유량을 예상하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이야기는 대개 이렇다.
“용적률을 더 높여야 합니다.”
“일반분양을 늘려야 사업성이 나옵니다.”
잠시 생각해보면 꽤 기묘한 장면이다.
사람이 많이 살아 주차가 부족하다는 집을 고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살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새 아파트에는 넓은 지하주차장을 만들 수 있다.
기술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하주차장도 공짜가 아니다.
더 깊이 파고, 더 넓게 만들고, 더 많은 차량을 수용하려면 그만큼 돈이 든다.
결국 다시 원점이다.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을 내가 모두 부담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많은 세대를 넣고 그들의 돈을 활용한다.
그것을 우리는 ‘사업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주거환경 개선과 개발이익은 구별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좋은 주거환경을 만드는 것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용적률은 그 비용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를 바꾸는 방법에 가깝다.
그런데 30년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가장 불편한 질문이 시작된다.
지금 인터뷰의 말을 그대로 믿어보자.
30년 된 집은 정말 누수와 주차 문제 때문에 살기 힘들다.
그래서 허문다.
수억 원의 건축비를 들여 새집을 짓는다.
현금을 넣고, 대출도 받고, 대지지분의 일부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면서 사업성을 맞춘다.
그렇게 번듯한 새 아파트를 얻었다.
그런데 그 아파트는 얼마나 오래 사용할 것인가.
30년 뒤에도 같은 말을 할 것인가.
“이제 30년 됐습니다.”
“누수가 생깁니다.”
“주차가 불편합니다.”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또 허물 것인가.
그때도 사업성이 부족하면 다시 용적률을 높여야 할 것이다.
다시 일반분양을 늘려야 할 것이다.
다시 더 많은 사람을 같은 땅 위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재건축은 단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30년 뒤 다음 재건축의 출발점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부모의 100이 자녀에게도 100으로 남을까
이 과정을 세대 단위로 생각해보면 더 이상해진다.
극단적인 숫자로 생각해보자.
부모 세대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토지지분을 100만큼 가지고 있었다고 하자.
30여 년이 지났다.
건물이 낡았다.
그런데 새 집을 자기 돈으로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용적률을 높이고 일반분양을 늘린다.
새로운 사람들이 같은 땅의 소유자로 들어온다.
기존 주민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던 토지 원본의 몫은 그만큼 나뉜다.
자녀 세대가 그 집을 물려받는다.
30년이 또 지나간다.
다시 집이 낡는다.
다시 사업성이 부족하다고 한다.
또 용적률을 높인다.
또 새로운 소유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부모 세대에서 100이었던 것이 자녀 세대에서는 30이 되고, 그 자녀 세대에서는 10이 되는 식의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닌가.
물론 실제 대지지분이 모든 단지에서 정확히 100에서 30, 다시 10으로 줄어든다는 뜻은 아니다.
숫자는 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비유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30년마다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하고, 그때마다 자기 돈으로 건축비를 감당하지 못해 용적률을 올리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토지 원본을 계속 더 많은 사람과 나누게 된다.
한 세대가 새 집을 얻는 대신 다음 세대가 물려받는 토지 몫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을 계속 ‘개발’이라고만 불러도 되는 것일까.
집값은 소득으로 따라갈 수 없는데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집값은 이미 평범한 근로소득으로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갔다.
수십억 원짜리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수십억 원의 현금을 축적한 것은 아니다.
집값이 5억 원에서 20억 원이 되었다고 월급도 네 배가 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묘한 일이 벌어진다.
20억 원짜리 집을 가진 사람이 몇 억 원의 분담금을 걱정한다.
겉으로는 거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지만, 30년 동안 소비한 건물을 다시 지을 현금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미래소득을 대출로 끌어오거나, 토지의 일부 가치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집값은 크게 올랐는데 새 집을 지을 돈은 없다.
이것이 한국 주택시장이 만들어낸 가장 이상한 풍경 중 하나다.
평생 집 한 채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정말 집을 30년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한 사람은 평생 집에 얼마를 써야 하는가.
30대에 집을 마련했다고 하자.
60대에 다시 한 번 지어야 한다.
그 집을 자녀에게 물려주면 자녀 역시 어느 시점에는 다시 건축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때마다 현금을 넣는다.
대출을 받는다.
그리고 부족하면 다시 대지지분을 활용한다.
이 정도가 되면 집은 삶을 담는 공간인지, 삶이 집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마치 달팽이가 집을 등에 지고 다니듯 우리는 평생 집 한 채를 등에 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일하고 돈을 벌어 집을 사고,
다시 일하고 돈을 모아 그 집을 허물고,
다시 집을 짓고,
그 집이 낡으면 다음 세대가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풍요로운 주거사회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재건축은 마법이 아니다
나는 재건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낡은 집은 고쳐야 한다.
고쳐 쓰는 것보다 다시 짓는 편이 합리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토지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건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비용이 사라진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누수가 심하다면 그것이 지금 집의 상태다.
주차가 불편하다면 그것도 지금 집의 상태다.
그 상태의 집을 좋은 집으로 바꾸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어디선가 온다.
내 현금에서 오거나, 미래소득을 담보로 한 대출에서 오거나, 내가 가지고 있던 토지 가치에서 오거나, 실제로 새롭게 만들어진 개발가치에서 온다.
그 네 가지를 모두 합쳐서 새 집을 만드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개발이익만 꺼내놓고 마치 재건축이 스스로 비용을 만들어내는 사업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특히 분담금을 내면서, 대출을 받으면서, 더 높은 용적률이 없으면 사업성이 없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재건축을 거대한 개발이익의 기회처럼 말하는 것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30년 만에 사람이 살기 힘든 집이라면 더욱 심각한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다시 짓고 있는가.
30년 뒤 또 허물 집인가.
그때 또 분담금을 내고, 또 대출을 받고, 또 ‘사업성’이라는 이름으로 대지지분을 줄이면서 용적률을 높일 것인가.
부모 세대가 가진 토지 원본의 얼마가 자녀에게 남고, 다시 그 자녀에게는 얼마가 남을 것인가.
그리고 가장 단순한 질문 하나가 끝까지 남는다.
자기 돈만으로 새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면, 재건축을 호재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말이 있다.
재건축은 마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