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의 지혜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남아 있는가

어린 시절 지혜와 절제의 책으로 읽었던 탈무드를 떠올리며, 오늘날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 전통이 강조해온 겸손과 평화의 원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묻는다. 건국 이후 반복된 전쟁과 안보 위협이 이스라엘의 강경한 선택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네타냐후 시대의 대외정책과 미국의 대이란 군사행동을 돌아보며, 미국 역시 동맹의 공포를 자신의 전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다른 수단과 다른 시기를 선택할 수 없었는지 질문한다. 결국 이 글은 이스라엘과 미국 모두에게 ‘얼마나 강한가’보다 ‘그 힘을 언제 쓰지 않을 줄 아는가’가 더 중요한 지혜일 수 있다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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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탈무드를 읽었다.

집에도 있었고 학교에서도 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탈무드 이야기였을 것이다. 현명한 재판관이 등장하고, 욕심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곤경에 빠지며, 눈앞의 이익보다 먼 훗날을 내다보는 사람이 결국 지혜로운 사람으로 남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탈무드는 내게 종교 경전이라기보다 수많은 박해와 유랑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축적한 지혜의 책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을 보고 있으면 역설적으로 그 탈무드의 몇몇 가르침이 떠오른다.

탈무드 《요마》 86a에는 ‘칠룰 하셈’, 즉 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토라를 배우고 현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정작 거래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만 비난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배웠다는 가르침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행동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기틴》 61a에는 ‘다르케이 샬롬’, 즉 ‘평화의 길’이라는 원칙도 나온다. 유대인이 아닌 가난한 사람도 돕고, 병든 사람을 찾아가며, 죽은 사람의 장례도 도우라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평화의 길을 위해서다.

《베라코트》 34b에서는 더욱 상징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보다 대제사장이 더 많이 몸을 굽히고, 왕은 그보다 더욱 몸을 낮춘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1,500여 년 전의 종교적 논의를 현대 국가의 외교정책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탈무드는 현대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 지침서도 아니다. 이스라엘 정부와 이스라엘 국민, 그리고 세계의 유대인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정치 지도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가능하다.

힘이 커질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름에 무엇을 남기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결국 공동체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

오늘날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정치 지도자들은 이 오래된 질문 앞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탄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와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1947년 유엔총회 결의 181호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끝난 뒤 이 지역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나누는 분할안을 채택했다. 이스라엘은 이듬해 독립을 선언했고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전쟁을 거치며 실제 영토와 경계는 유엔 분할안과 크게 달라졌다.

탄생부터 전쟁이었다.

1948년 전쟁, 1967년 전쟁, 1973년 전쟁, 테러와 인티파다, 로켓과 미사일 공격을 겪어온 이스라엘 사회가 안보를 거의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스라엘의 적들 역시 이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국가와 세력이 있었고,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와 공격도 반복됐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적대해왔으며 핵 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행동을 단순히 호전성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안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안보적 선택이 현명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생존하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과 끊임없이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말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강경파 지도자였던 메나헴 베긴은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수차례 전쟁을 치렀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듬해 평화조약을 맺었고, 두 국가의 전쟁은 그 뒤로 재발하지 않았다.

1993년 이츠하크 라빈 정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다. 그 과정은 결국 기대했던 평화로 완성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정치적 협상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네타냐후 집권기에도 다른 길은 있었다.

2020년 이스라엘은 UAE와 바레인 등과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아브라함 협정은 대화와 상호 이해, 국가 간 협력을 통해 중동의 평화와 안정에 접근한다는 원칙을 명시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주변과 싸우며 사는 것을 숙명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환경이 강요한 전쟁도 있었지만 지도자들이 선택한 평화도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정치가 존재한다.

2026년 9월 24일 유엔총회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연단에 오르자 수십 명의 각국 대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총회장을 빠져나갔다. 로이터 사진에는 네타냐후가 연설하는 동안 상당수 좌석이 비어 있는 모습도 담겼다.

정확히 몇 나라가 퇴장했고 몇 나라가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았는지를 놓고는 집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숫자만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약한 나라가 아니다.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미국이라는 강력한 동맹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강하다는 것과 주변으로부터 신뢰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적을 공격할 능력이 있다는 것과 적을 줄이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다르다.

여기서 탈무드의 오래된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름을 지키는 것인가.

그리고 국가의 지도자는 자신의 행동으로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오늘의 적을 물리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내일의 적을 만들지 않는 일 아닐까.

국가안보라는 것도 결국 그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매번 더 많은 군사력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안보라면 그것은 얼마나 안정된 안보인가.

적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고, 더 많은 무기를 가질수록 주변이 더욱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이 다시 더 큰 적대감을 낳는다면 그 순환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하면 이스라엘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자신의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란은 고농축 우라늄을 상당량 보유했고, 국제원자력기구는 이란 핵 프로그램에 관한 검증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이란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핵무기 전용 가능성과 탄도미사일 능력을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국에 별도의 질문이 생긴다.

이스라엘의 안보 판단과 미국의 안보 판단은 언제나 같아야 하는가.

2026년 2월 26일, 미국과 이란은 오만의 중재 아래 제네바에서 협상을 하고 있었다.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우라늄 농축, 제재 해제, 탄도미사일과 이란이 지원하는 지역 무장세력 문제를 놓고 양측의 간극은 여전히 컸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된 것도 아니었다.

중재자인 오만 외무장관은 협상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고, 미국과 이란은 각자의 정부와 협의한 뒤 다시 협상하기로 했다. 다음 주 빈에서는 기술적 수준의 논의도 예정돼 있었다.

2월 27일에도 오만 외무장관은 외교에 시간을 준다면 합의가 가능하다는 취지로 공개적으로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시에 무력사용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미국 대통령의 최종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시작됐다. 미 합참의장이 이후 공개한 작전 시간표에 따르면 미군은 2월 27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최종 명령을 받았으며, 이튿날 이스라엘군의 작전과 연계된 대규모 공격에 들어갔다.

나중에 로이터는 이 결정 과정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했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공격 직전 네타냐후는 트럼프와 통화하면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 지도부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설명했고, 이 통화와 관련 정보가 트럼프의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작전 목적을 이란의 핵무기 획득 저지와 탄도미사일·해군·무장세력 지원 능력 약화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스라엘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미국에는 미국 나름의 전략적 이해와 위협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질문은 더 무거워진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최종적으로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정말 2월 28일이어야 했는가.

이틀 전 협상에서 진전이 있었다면 한 번 더 만나볼 수는 없었는가.

이미 예정돼 있던 기술협상까지 지켜볼 수는 없었는가.

핵 프로그램에 대한 검증과 농축 제한부터 잠정적으로 합의하고, 탄도미사일과 지역 안보 문제를 다음 단계로 넘기는 방법은 불가능했는가.

대규모 군사력을 중동에 배치해 압박하면서도 협상에 명확한 시한을 주는 방법은 없었는가.

물론 이런 선택들이 성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란이 시간을 끌었을 수도 있다.

합의를 거부했을 수도 있고, 협상을 진행하면서 군사 능력을 보강하려 했을 수도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당시 공개하지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협상만 했으면 평화가 왔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아니다.

훨씬 단순한 질문이다.

행동을 달리할 수 없었다면, 시기라도 달리할 수는 없었는가.

그 질문은 지금 더욱 의미가 있다.

전쟁을 치른 지 수개월이 지난 2026년 9월, 미국과 이란은 다시 외교적 접촉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 22일 양국 간 대화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으며, 이란도 호르무즈 해협과 군사적 압박 문제 등을 놓고 협상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다시 협상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2월 28일 이전에 조금 더 할 수는 없었는가.

전쟁을 거친 뒤 얻을 수 있는 협상 조건이 전쟁 전에 얻을 수 있었던 조건보다 얼마나 나아졌는가.

전쟁이 정말 불가피했다면, 그것이 불가피해진 정확한 시점은 언제였는가.

동맹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다.

동맹국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과 동맹국이 원하는 모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좋은 동맹이라면 함께 싸워주는 것뿐 아니라 때로는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말해줄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국가이익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단기적인 군사적 목표와 장기적인 안전이 언제나 일치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스라엘에도 같은 질문이 돌아간다.

전쟁에서 몇 번 이겼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다음 세대가 상대해야 할 적을 얼마나 줄였는가.

이스라엘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더 많은 군사력과 더 강력한 동맹 없이는 안전할 수 없는 국가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미국에도 묻게 된다.

동맹을 지킨 것인가.

아니면 동맹국이 느끼는 위협을 충분히 검토하기 전에 자신의 전쟁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오래전 탈무드는 현대의 중동정치를 알지 못했다.

핵무기도, 탄도미사일도, 전투기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탈무드에서 오늘의 전쟁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질문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다.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절제가 필요한가, 더 적은 절제가 필요한가.

오늘의 승리를 위해 얻은 것이 내일 잃게 될 것보다 정말 큰가.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도, 그 이스라엘과 함께 전쟁을 선택한 미국의 지도자들에게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힘이 있다는 것과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어쩌면 진짜 힘은 싸울 수 있는 능력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싸울 수 있는데도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쓸 수 있는 힘과 써야 하는 힘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오늘 이길 수 있는 싸움 앞에서도 내일의 평화를 계산하는 것.

어린 시절 탈무드에서 읽었던 지혜가 아직 의미를 가진다면, 아마 그런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은 간단하다.

오늘의 이스라엘과 미국의 지도자들은 그 오래된 지혜 앞에 얼마나 떳떳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