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왜 자유를 외치면서 ‘진짜 힙합’을 따질까

힙합은 샘플링과 장르 혼합을 통해 성장하며 “공식이 없다”는 자유를 강조해왔지만, 동시에 “진짜 힙합”과 “가짜 힙합”을 끊임없이 구분하고 내부의 정통성과 자격을 심사해온 장르이기도 하다. 다른 장르의 요소를 자유롭게 흡수하면서 정작 힙합과 비슷한 음악을 힙합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인 뒤 “왜 힙합을 그렇게 하느냐”고 비판하는 모습은 역설적이다. 결국 힙합의 가장 흥미로운 모순은 음악적으로는 가장 잡종적이면서 문화적으로는 가장 순혈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데 있으며, “진짜 힙합인가”보다 “어떤 음악인가”라고 묻는 것이 오히려 힙합이 말해온 자유에 더 충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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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가장 꼰대, 순혈주의 힙합

힙합은 자유의 음악처럼 말한다.

정해진 공식이 없다고 하고,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다고 한다. 펑크와 소울을 샘플링하고, 재즈와 록을 섞고, 전자음악을 받아들이고, 오토튠도 쓰고, 노래와 랩의 경계도 무너뜨린다. 실제로 힙합의 역사는 끊임없는 혼합과 변형의 역사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이토록 자유롭다는 장르에서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건 힙합이 아니다.” “너는 힙합을 모른다.” “저건 가짜다.” “우리가 진짜다.”

자유를 가장 크게 외치는 장르가 오히려 누구보다 끊임없이 내부의 자격을 심사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힙합은 정말 가장 자유로운 장르일까. 아니면 알고 보면 가장 순혈주의적인 장르일까.

힙합에서 흔히 “힙합에는 공식이 없다”는 말을 한다. 얼핏 듣기에는 멋진 선언이다. 음악에는 정답이 없고, 새로운 시도야말로 힙합의 정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금세 문제가 생긴다.

정말 공식이 없다면 성시경의 전형적인 발라드도 힙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힙합 팬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의 경계는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힙합에는 반드시 특정 BPM이 있어야 한다”거나 “킥과 스네어가 이런 방식으로 배치되어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공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르에는 수학 공식처럼 명확한 필요충분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힙합이고 저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면 적어도 어떤 기준들의 집합은 존재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힙합은 그 기준을 굉장히 유동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음악이 힙합의 영향을 조금 받았다면 힙합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랩이 들어가고, 808 드럼을 쓰고, 리듬이나 프로덕션에서 힙합적 요소를 활용하면 어느 순간 “힙합 음악”으로 분류된다.

그런 다음 비판이 시작된다.

“왜 힙합을 저렇게 하느냐.”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 사람이 굳이 정통 힙합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먼저 힙합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놓고 힙합의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냥 “힙합의 영향을 받은 음악”이라고 하면 될 일이다.

록적인 기타가 들어간 발라드를 듣고 우리는 반드시 그 음악을 록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 국악기를 사용한 대중가요를 모두 국악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트로트 리듬과 팝 사운드를 섞었다면 혼합된 음악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장르에서는 이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즈적인 느낌이 있다.” “록의 영향을 받았다.” “국악과 팝을 섞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힙합에서는 종종 장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곧 장르 내부로의 편입으로 이어지고, 편입된 순간부터 정통성 심사가 시작된다.

이것이 힙합의 독특한 역설이다.

힙합은 태생부터 순혈과 거리가 멀었다.

다른 음악의 일부를 가져와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샘플링은 힙합의 가장 중요한 창작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펑크도 가져왔고, 소울도 가져왔고, 재즈도 가져왔고, 록도 가져왔다.

힙합은 다른 장르의 경계를 침범하며 성장했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한 장르가 자기 경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다.

밖으로 나갈 때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안으로 들어올 때는 신분증을 검사하는 셈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진짜’라는 표현이다.

음악에는 원래 수많은 평가 기준이 있다. 멜로디가 좋을 수도 있고, 연주가 뛰어날 수도 있고, 가사가 훌륭할 수도 있고, 사운드 디자인이 혁신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힙합에서는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진짜 힙합인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주 따라붙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장르 분류를 넘어선다.

누가 직접 가사를 썼는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씬에서 활동했는가. 얼마나 힙합의 역사를 아는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스타일을 바꾼 것은 아닌가.

음악을 평가하다가 어느 순간 사람의 자격을 심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힙합에서의 순혈주의는 음악적 순혈주의와도 조금 다르다.

오히려 음악은 얼마든지 섞어도 된다.

재즈를 넣어도 되고, 록을 넣어도 되고, 팝을 넣어도 되고, 노래를 해도 되고, 전자음악을 가져와도 된다.

그 대신 사람에게 순혈을 요구한다.

태도가 진짜여야 하고, 이력이 진짜여야 하고, 가사가 진짜여야 하고, 문화적 계보가 진짜여야 한다.

음악적 잡종성 위에 문화적 순혈주의가 올라가 있는 묘한 구조다.

물론 이런 현상을 힙합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록에도 “저건 진짜 록이 아니다”라는 사람이 있고, 메탈에는 더 세밀한 장르 경찰이 있으며, 재즈에도 전통과 혁신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있다.

어떤 문화든 규모가 커지면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다만 힙합에서는 그것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이유는 아마 힙합에서 경쟁과 자기 과시가 처음부터 중요한 표현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최고다.” “너보다 내가 잘한다.” “나는 진짜고 너는 가짜다.”

이런 말 자체가 힙합에서는 하나의 놀이이고 공연이며 캐릭터다.

문제는 그 공연의 언어가 실제 음악의 법률처럼 작동하기 시작할 때다.

“내가 최고다”는 가사는 재미있다.

“내 음악이 더 멋있다”는 주장도 당연히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진짜 힙합이고 너는 힙합을 모른다”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취향이 권위가 되고, 경쟁이 심사가 되고, 자유의 선언이 규율로 변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힙합은 자신이 가장 싫어한다고 주장했던 모습과 닮아간다.

꼰대다.

꼰대의 가장 전형적인 문장은 이것이다.

“원래 이 바닥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힙합이 가장 자주 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정반대였다.

“원래라는 건 없어.”

그래서 힙합의 순혈주의가 더 흥미롭다.

원래라는 것이 없다면서 원래를 가르치고, 공식이 없다면서 정답을 요구하고, 경계를 깨자면서 경계를 지키라고 한다.

물론 이것이 힙합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힙합의 역사를 실제로 앞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개 기존의 힙합 팬들이 불편해했던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리듬을 만들고, 랩의 방식을 바꾸고, 노래와 랩을 섞고, 다른 장르를 끌어들이고, 기존에는 힙합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소리를 힙합 안으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저게 힙합이냐”는 말을 들었던 음악이 몇 년 뒤 새로운 표준이 되는 일도 반복됐다.

그래서 어쩌면 힙합에서 가장 힙합다운 행동은 “무엇이 진짜 힙합인가”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를 계속 흔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힙합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된 장르가 아니었다.

사실 어떤 장르도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한 뒤 나중에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장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분류다.

그러니 힙합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힙합 같지는 않은 음악이 등장했을 때 반드시 판결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다.

그냥 힙합 비스무리한 새로운 음악일 수도 있다.

힙합의 영향을 받은 팝일 수도 있고, 팝의 영향을 받은 힙합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닌 새로운 무엇일 수도 있다.

음악은 그렇게 움직인다.

어쩌면 가장 자유롭다는 장르가 정말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운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건 진짜 힙합인가?”

라는 질문을 조금 덜 하는 것.

그리고 대신

“저건 어떤 음악인가?”

라고 묻는 것.

힙합이 다른 음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어왔던 만큼, 다른 음악도 힙합의 경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힙합에는 공식이 없다”는 말을 가장 진지하게 실천하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