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마(銀馬)라는 이름이 참 고급스럽고 좋지 않아요?
강남 재건축의 상징이자 직관적이고 고급스러운 네이밍 트렌드의 선두 격인 은마아파트가 이주를 앞두고 4억 3,000만 원이라는 분담금 폭탄을 맞으면서, "강남 사시면서 그 정도도 못 내냐"는 외부의 냉소와 "낡아가는 구조물을 재산이라 착각했다"는 조합원들의 자조 속에서 브랜드의 상징성과 냉혹한 현금 조달 현실 간의 극명한 대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때 아파트 이름은 단 두 글자면 충분했다. 은빛 말의 기상을 담은 ‘은마(銀馬)’. 1979년 대치동 벌판에 들어선 이 직관적이고 고풍스러운 이름은 지난 40여 년간 대한민국 부동산의 상징이자 강남 재건축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최근 재건축 시장에는 흥미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한동안 ‘지역명+건설사 브랜드+센트럴·자이·클래스티지’ 같은 외래어 펫네임이 무한정 길어지며 10자에 육박하던 아파트 이름들이 다시 ‘짧고 굵은’ 직관적 명칭으로 돌아오는 추세다. 복잡한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지 않아도, 단 두 글자만으로 단지의 정체성과 가치를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 진짜 프리미엄이라는 깨달음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은마’라는 이름은 시대를 앞서간 가장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네이밍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아날로그적 품격과 달리, 오늘날 은마가 처한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다.
내년 상반기 이주를 목전에 두고 조합원들에게 떨어진 것은 ‘수억 원대의 분담금 폭탄’이다. 전용 84㎡를 가진 소유주가 새 아파트 동일 평형을 받으려면 약 4억 3,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추가로 내놓아야 한다. 공사비와 인건비의 고공행진, 높았던 기존 용적률(204%), 분양가상한제라는 구조적 한계가 물리면서, 화려한 재건축의 꿈 뒤편에 차디찬 현금 조달의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간의 시선은 싸늘하게 갈린다.
“거기 사시면서 건축비 4억 3천만 원도 못 내시나요?”
외부에서는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강남 한복판 아파트 소유주들을 향해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장의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40년 넘은 노후 단지인 만큼, 수십 년간 실거주하며 자산을 아파트 한 채에만 묻어둔 고령층 가구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당장 수억 원의 현금을 융통하기 힘든 이들에게 이번 분담금은 집값 상승의 기쁨이 아니라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결국 한평생 강남 자산가라는 착각 속에 살아왔지만, 수억 원의 현금 앞에서 비로소 쓰라린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낡아가는 구조물을 재산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 뿐이었나’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이다. 땅값의 착시 속에 가려져 있던 감가상각된 콘크리트 덩어리의 냉정한 가치가, 막대한 건설 비용이라는 현실의 영장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은마라는 이름이 참 고급스럽고 좋지 않아요?"
누군가는 여전히 은마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과 미래 가치를 기대하며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이름의 단순함과 고급스러움으로 가치를 증명하려는 요즘 트렌드 속에서 ‘은마’는 이미 완성된 훌륭한 브랜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이름값을 다하기 위해 주민들이 치러야 할 현실의 무게, 그리고 "강남 부자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 속에서 은마아파트는 지금 부의 상징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힘겹게 견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