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는 마이클 베이에게 사과하라
트럼프 대통령이 온타리오호의 미국 내 명칭을 ‘아메리카호’로 바꾸도록 지시한 사건은 단순한 지명 변경 이상의 상징성을 갖는다. 미국은 오랫동안 할리우드와 정치적 서사를 통해 자신을 세계질서를 지키는 ‘세계경찰’로 묘사해왔지만, 최근에는 동맹·무역·달러 패권에서 발생한 비용을 다른 나라에 청구하는 언어를 점점 강화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패권의 수익은 자신의 능력과 권리로 계산하면서 그 비용은 세계를 위한 희생으로 계산한다는 점이다. 제조업 쇠퇴와 세계화의 피해가 실제였더라도, 미국 전체가 세계화와 달러 패권에서 순이익을 얻었다면 먼저 그 이익이 미국 내부에서 어떻게 분배됐는지를 물어야 한다. 국내에서 해결하지 못한 분배 실패의 청구서를 중국·유럽·캐나다에 보내기 시작하면 보호무역과 보복, 저성장이 다시 불만을 키우는 ‘둠 루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수십 년간 그 이미지를 팔아온 미국이라면, 이제 와서 경호비 청구서를 내미는 모습이 과연 자신이 만들어온 서사와 모순되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언제부터 청구서를 보내는 경호업체가 되었나
회사가 어려워졌다.
사장은 직원들을 불러 말한다.
“지금은 모두가 희생해야 할 때입니다. 회사가 살아야 여러분도 삽니다.”
직원들은 박봉을 견디고 야근을 한다. 몇 년 뒤 회사는 크게 성공한다. 이제 직원들이 그때의 희생을 이야기하자 사장은 태도를 바꾼다.
“그래도 임금은 시장 평균에 맞게 지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회사가 잘될 때 직원은 말한다.
“회사의 성공에는 내 기여도 있으니 성과를 나눠야 합니다.”
그러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정액급여를 받기로 계약했습니다. 경영위험은 사장의 몫이죠.”
둘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마다 분배의 원칙을 바꾼다는 것이다.
좋을 때는 공동체를 말하고 나쁠 때는 계약을 말한다. 혹은 좋을 때는 계약을 말하다가 나쁠 때는 공동체를 찾는다.
나는 요즘 미국이 세계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꾸 이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온타리오호의 미국 내 공식 명칭을 ‘Lake America’, 즉 ‘아메리카호’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이름만 보면 우스운 이야기다.
그러나 그 배경 논리를 들여다보면 별로 웃기지 않는다.
미국은 자신이 5대호를 지키는 데 더 많은 비용을 부담했고, 쇄빙선을 운용했으며, 생태계 보호와 항로 유지에 막대한 돈을 썼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온타리오호가 미국의 산업과 에너지, 무역과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논리는 익숙하다.
우리가 더 많이 지켰다.
우리가 더 많이 냈다.
우리가 이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니 우리의 몫도 더 커야 한다.
최근 미국이 세계를 향해 반복하고 있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동맹국을 지켜주었다. 그러니 방위비를 더 내라.
미국은 세계 최대 소비시장을 제공했다. 그런데 왜 너희가 미국을 상대로 흑자를 보는가.
미국은 달러와 미 국채이라는 세계의 준비자산을 공급했다. 그런데 그 결과 달러가 고평가되고 미국 제조업이 피해를 봤다.
미국은 자유무역질서를 지켰다. 그런데 그 질서를 이용해 성장한 나라들이 미국 산업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이제 청구서를 보내겠다는 것이다.
캐나다는 그 청구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받아든 나라가 됐다.
미국과 캐나다는 관세를 주고받고, 무역협상을 둘러싸고 갈등하고, 이제는 양국이 함께 공유하는 호수의 이름을 두고도 충돌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누가 지명학적으로 옳은가가 아니다.
미국이 자신의 힘을 설명하는 언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미국은 세계에 자신을 전혀 다르게 소개했다.
그 시대를 가장 화려하게 영상으로 만들어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마이클 베이다.
그의 영화 속 미국은 늘 바쁘다.
외계의 위협이 닥치면 미국이 출동한다.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지면 미국인이 우주로 올라간다. 세계가 위험에 처하면 미군의 항공모함이 움직이고 전투기가 뜬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와 실제 국제정치는 다르다.
하지만 문화가 보여주는 자기 이미지는 중요하다.
20세기 후반 미국이 세계에 판매한 가장 성공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강하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강하기 때문에 책임진다.
미국의 군사력은 단순한 미국의 자산이 아니라 자유세계의 방패였다. 미국 해군이 지키는 해상교통로는 미국 선박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달러와 미국 금융시장은 미국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경제를 떠받치는 기반이었다.
물론 그것은 순수한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미국도 알고 있었고 세계도 알고 있었다.
그 질서의 중심에 있는 대가는 막대한 대신, 중심에 있다는 이익 역시 막대했다.
미국 기업들은 거대한 세계시장에 진출했다. 미국 금융시장은 전 세계의 자금을 빨아들였다. 미국 정부는 자국 통화로 부채를 발행했다. 달러 결제망은 미국에 다른 어떤 국가도 갖지 못한 금융적 영향력을 부여했다.
군사동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동맹국을 지켰지만, 동시에 동맹이라는 구조를 통해 세계 곳곳에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것이 패권이었다.
비용 없는 권력이 아니라,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더 큰 힘과 편익을 얻는 구조였다.
그런데 요즘 미국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패권이 가져온 수익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미국의 능력과 제도와 경쟁력이 만들어낸 정당한 성과가 된다.
반면 패권이 가져온 비용을 이야기할 때는 갑자기 미국이 세계를 위해 감내한 희생이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패권의 수익은 권리로 계산하고, 패권의 비용은 희생으로 계산한다.
좋았던 시절의 패권은 미국의 성취였고, 나빠진 시절의 패권은 세계가 미국에 떠넘긴 짐이 되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그간 팔아먹은 헐리웃 영화를 생각하면 부끄럽지 않은가.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영화와 드라마와 뉴스와 정치연설을 통해 자신을 세계의 경찰로 묘사했다.
자신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가장 큰 책임을 짊어지는 나라.
동맹을 버리지 않는 나라.
해로를 지키고, 침략을 막고,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나라.
그것이 미국이 스스로 세계에 판매한 도덕적 자기 이미지였다.
즉, 할리우드가 세계에 보여준 미국의 이미지는 단순한 영화적 허상이 아니라 미국이 스스로 보여주고 싶어 했던 자기상이었고,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시절의 모든 행동을 장부로 환산한 뒤 “우리가 이렇게 많이 냈으니 너희도 그만큼 내라”고 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계경찰과 경호업체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경찰은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경호업체는 서비스를 제공한 만큼 비용을 청구한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신을 전자로 설명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언어는 점점 후자에 가까워진다.
물론 미국 제조업이 입은 상처는 실제다.
세계화 과정에서 공장이 문을 닫고 중산층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특정 산업도시와 지역사회가 무너졌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다음 질문이다.
그들은 정말 세계를 위해 희생한 미국의 피해자였을까.
아니면 세계화와 미국 패권이 만들어낸 막대한 이익을 미국 사회 내부에서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결과의 피해자이기도 했을까.
만약 미국 전체가 세계화와 달러 패권에서 장기간 순이익을 얻었다면, 제조업 노동자들이 입은 손실의 반대편에는 그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은 누군가가 미국 내부에 존재해야 한다.
값싼 수입품을 소비한 사람들이 있었다.
해외 생산을 이용해 비용을 낮춘 기업들이 있었다.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자본 덕분에 가치가 상승한 주식과 채권과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적 공급망을 활용해 막대한 이익을 얻은 기업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달러와 군사동맹이 제공하는 엄청난 국제적 영향력을 누렸다.
그런데 제조업 지역이 무너졌을 때 미국은 충분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 질서에서 누가 얼마나 벌었는가.
누가 얼마나 잃었는가.
이익을 얻은 사람들에게서 일부를 걷어 비용을 부담한 공동체에 돌려줄 수는 없었는가.
산업 전환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수는 없었는가.
교육과 인프라와 사회보험을 통해 세계화의 패자가 다시 일어설 시간을 사줄 수는 없었는가.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직원들에게 함께 견디자고 말했다면, 회사가 크게 성공했을 때 그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묻는 것과 같다.
패권의 수익을 패권의 비용을 부담한 국민과 나누는 문제다.
그러나 미국은 그 질문을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설명이 등장했다.
당신의 공장이 문을 닫은 것은 우리의 분배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 때문이다.
캐나다 때문이다.
동맹국 때문이다.
세계가 미국의 호의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에게 돈을 받아내자.
에스와르 프라사드가 말하는 ‘둠 루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세계화가 부를 만들어도 그 성과가 제대로 배분되지 않으면 피해를 본 사람들은 시스템과 엘리트를 불신한다.
그 불신은 보호무역과 포퓰리즘을 낳는다.
보호무역은 공급망을 갈라놓고 비용을 높인다.
성장은 둔화되고 분배할 파이는 작아진다.
그러면 정치적 불만은 더욱 커지고 더 강한 보호주의가 요구된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세계화의 승자가 패자를 보상하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선의가 아니었다.
세계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했어야 할 유지비였다.
그 유지비를 아낀 결과 지금 미국과 세계는 훨씬 비싼 비용을 관세와 보복관세, 공급망 중복, 정치적 적대감으로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캐나다와 미국의 싸움은 특히 씁쓸하다.
캐나다는 적성국가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비무장 국경을 공유하며 수십 년 동안 안보와 산업과 공급망을 함께 구축해온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가운데 하나다.
그런 나라와 관세를 주고받고, 마침내 함께 공유하는 호수의 이름을 자기 나라 이름으로 바꾸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쩌면 ‘Lake America’는 중요한 경제정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를 보여주는 훌륭한 표지판은 될 수 있다.
미국은 과거 자신이 만든 세계질서를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책임진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가 책임졌으니 돈을 내라.
둘은 전혀 같은 문장이 아니다.
물론 동맹국도 정당한 방위비를 부담해야 한다.
불공정한 무역관행과 국가보조금, 지식재산권 침해와 시장장벽에는 대응해야 한다.
미국이 모든 비용을 혼자 부담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힘에서 발생한 이익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기록하고, 그 힘을 유지하는 데 들어간 비용만 다른 사람의 미납금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공정한 비용분담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것은 회계원칙을 중간에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마이클 베이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가 수많은 폭발과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동원해 세계에 팔아온 미국은 적어도 이런 나라는 아니었다.
그 미국은 세계가 위험해지면 계산기를 꺼내기 전에 출동했다.
자신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가장 큰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미국의 위대함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현실을 얼마나 정확히 반영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패권에는 권리뿐 아니라 책임도 있다는 자기인식이었다.
세계경찰은 물론 비용을 부담한다.
다른 나라들도 정당한 몫을 나눠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수십 년 동안 제복이 주는 권위와 영향력을 누린 뒤 어느 날 장부를 들고 나타나 주민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동안 내가 동네를 지켜줬으니 밀린 경호비를 내시오.”
그 순간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당신은 정말 경찰이었던가.
아니면 청구서를 뒤늦게 보내는 경호업체였던가.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고 싶다면 아마 다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계가 미국에 무엇을 빚졌는지를 계산하기 전에, 미국이 세계질서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를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에서 미국 전체가 많은 것을 얻었는데도 일부 미국인들이 삶의 기반을 잃었다면, 먼저 물어야 한다.
그 이익은 어디로 갔는가.
왜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청구서를 중국에 보내고, 유럽에 보내고, 캐나다에 보내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해결하지 못한 분배의 실패를 국제적인 채무관계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에게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하면 세계경제에는 승자가 거의 남지 않는다.
아마 그것이 진짜 ‘둠 루프’일 것이다.
온타리오호는 작은 호수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 호수에 붙이려는 ‘America’라는 이름에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변화가 담겨 있다.
한때 미국은 세계를 향해 자신이 왜 강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이제는 세계를 향해 자신이 얼마나 많이 냈는지를 설명한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던 나라가 경호비 청구서를 흔드는 나라가 된 것이다.
미국은 그간 팔아먹은 헐리웃 영화를 생각하면, 정말 조금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적어도 마이클 베이에게는 사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