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국경을 다시 세우자, 세계화는 과거형이 되었다
세계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다. 냉전 이후 세계는 국경을 낮추고,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하며, 자유무역과 자본 이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그 흐름이 역전되고 있다. 특히 역설적인 점은 세계화를 설계했던 미국이 멕시코 국경 단속, 관세, 기술 통제, 전략산업의 국내 회귀, 동맹 중심 공급망 구축 등을 통해 새로운 경계를 세우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동의 에너지 수송 불안과 미중 경쟁, 러시아 문제까지 겹치면서 세계는 효율성보다 안보를 우선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생산비 상승, 재정 부담, 국채 공급 확대, 고금리 장기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세계 경제가 이미 저금리와 과도한 부채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높은 금리가 오래 지속되면 일부 가계와 기업의 강제매각과 부실만으로도 시장가격과 사회 분위기가 흔들릴 수 있다. 결국 세계는 국경을 강화하면서도 세계화가 제공했던 저물가와 효율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얻기는 어렵다. 세계화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점점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설명하는 말이 되고 있다.
마치 ‘사랑한다’의 반댓말을 ‘사랑했었다’라고 할 수 있듯, 어떤 시대의 반대는 그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과거형으로 만드는 말인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화가 그렇다.
세계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수많은 컨테이너선이 바다를 건너고, 자본은 국경을 넘으며, 아이폰 하나에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된 부품이 들어간다. 세계 무역도 존재하고 글로벌 기업도 건재하다.
그럼에도 세계화는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세계화가 여전히 세계가 향하는 방향인가 하는 것이다. 냉전 이후 수십 년 동안에는 분명했다. 국경은 낮아지고, 상품과 자본과 사람이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공급망은 더 길어지고, 국가경제는 더 긴밀하게 연결되는 방향으로 세계가 움직였다.
오늘날 그 방향은 반대다.
그리고 그 반대 방향의 선두에 역설적으로 미국이 서 있다.
냉전 이후의 세계화는 미국이 만든 질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강조했고 자본 이동을 자유화했으며, 달러와 미국 금융시장을 세계 경제의 중심에 놓았다. 미 해군이 해상 교통로의 안전을 뒷받침하는 동안 기업들은 국적보다 비용을 따졌다. 중국에서 만드는 것이 싸다면 중국에서 만들었고, 러시아산 가스가 저렴하다면 유럽은 러시아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비교우위와 효율성이 국경보다 중요했던 시대였다.
그런데 세계화를 만들었던 미국이 이제 국경을 다시 세우고 있다.
가장 눈에 보이는 국경은 멕시코와 맞닿은 실제 국경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이민 단속으로 멕시코 북부의 이민자 보호시설들이 한산해질 정도로 미국을 향한 이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이는 자유무역과는 별개의 이민정책이지만, 한 시대의 방향을 보여주는 장면으로서는 매우 상징적이다. 국가가 다시 자신의 경계선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리적인 국경 밖에서도 새로운 국경들이 세워지고 있다.
상품에는 관세라는 국경이 생긴다. 기술에는 수출통제라는 국경이 생긴다. 반도체와 의약품, 핵심광물과 에너지에는 국가안보라는 국경이 그어진다. 미국은 전략산업의 생산시설을 미국 안으로 가져오는 기업에는 혜택을 주고, 외국 생산에 대해서는 관세와 규제를 활용하고 있다. 2026년에도 미국은 의약품 관세를 국가안보와 공급망 강화의 수단으로 공식화했다.
심지어 미국 시장에 접근하고 싶다면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압박까지 나타난다. 최근 트럼프는 캐나다 항공기 제조사 봄바디어를 향해 미국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미국 시장 접근을 제한할 수 있다는 취지의 압박을 가했다. 실행 가능성은 별개의 문제지만, 이 발언이 보여주는 방향은 명확하다. 시장을 개방하고 생산지는 기업이 선택하도록 두던 세계화의 논리에서, 시장 접근과 생산지역을 국가가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질문은 이랬다.
“어디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싼가.”
지금의 질문은 달라졌다.
“어디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안전한가.”
두 질문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든다.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하려면 국경의 의미를 줄여야 한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생산하려면 국경과 동맹을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이 추구하는 것은 세계화의 완전한 폐기라기보다 세계화를 다시 자신의 통제 가능한 범위 안으로 접어 넣는 것에 가깝다. 중국과의 교역을 모두 중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반도체와 첨단기술, 핵심광물과 에너지까지 중국에 의존할 수도 없다.
효율적인 세계화에서 관리되는 세계화로, 국경 없는 공급망에서 동맹 중심의 공급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정치가 명령한다고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미국의 관세를 피해 중국을 떠났던 기업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최근의 사례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중국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든 숙련노동자, 협력업체, 물류망, 전력과 생산 인프라를 다른 나라에서 단기간에 복제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세계화의 경제적 논리는 아직 살아 있는데 지정학이 그 반대편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셈이다.
바로 여기에 지금 세계 경제의 긴장이 있다.
세계화는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효율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점점 위험하다고 판단되고 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러한 변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세계화 시대의 경제는 상품이 자유롭게 생산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중동에서 석유가 생산되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고, 홍해와 수에즈 운하를 지나 세계시장으로 공급됐다.
최근에는 바로 그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수송이 불안정해지자 사우디아라비아는 홍해 쪽으로 원유를 보내는 동서 송유관을 중요한 우회로로 이용했다. 그런데 그 송유관마저 드론 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가동이 중단됐다. 하루 400만~500만 배럴을 운송하던 중요한 통로였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고, 시장은 공급 자체뿐 아니라 공급망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유가 문제가 아니다.
세계화는 생산의 국제분업뿐 아니라 운송의 안전을 전제로 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제 해협이 위험하면 다른 항로를 찾고, 바다가 위험하면 송유관을 만들며, 그 송유관마저 공격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효율적으로 연결된 세계는 역설적으로 연결고리 하나가 끊어질 때 충격이 멀리까지 전달되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곧 물가로 옮겨간다.
석유가 오르면 운송비가 오른다. 운송비가 오르면 상품가격이 오른다. 기업의 생산비가 오르고 가계의 생활비가 오른다. 지금처럼 높은 부채를 가진 세계에서 이것은 특히 곤란한 문제다.
과거에는 경기침체가 오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면 됐다.
하지만 에너지 가격 상승 때문에 물가까지 높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기는 나빠지는데 금리는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
여기에 세계화의 후퇴가 만드는 비용까지 겹친다.
공급망을 여러 군데에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공장을 국내에 다시 지어야 한다. 핵심광물을 확보해야 하고 발전소와 전력망을 확충해야 한다. 방위비도 늘려야 한다. AI 데이터센터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세계화 시대에는 하나의 가장 효율적인 공장을 찾았다면, 이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두 번째와 세 번째 공장까지 필요하다.
경제적 비효율이지만 안보의 관점에서는 보험료다.
그러나 보험료는 결국 누군가 지불해야 한다.
기업이 지불하면 제품가격이 올라가고, 정부가 지불하면 재정적자가 늘어나며, 정부가 빚으로 충당하면 국채 공급이 늘어난다.
이 지점에서 세계화의 후퇴와 고금리는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지금의 높은 장기금리를 단순히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만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세계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환에도 돈이 필요하다.
AI에도 돈이 필요하다.
공급망 재편에도 돈이 필요하다.
국방에도 돈이 필요하다.
제조업을 다시 국내로 끌어오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
금리는 결국 돈의 가격이다.
돈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진다면 돈의 가격이 과거처럼 계속 싸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문제는 세계 경제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반대의 환경에 적응했다는 데 있다.
저물가와 저금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정부도 빚을 늘렸고 기업도 빚을 늘렸으며 가계도 낮은 금리를 전제로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매입했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 특히 민감하다.
가계부채와 자영업자 대출, 기업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 전세보증금이 서로 얽혀 있다. 어느 하나가 완전히 독립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미국 국채금리가 5%에 근접하느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높은 금리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6개월 동안의 높은 금리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3년, 5년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낮은 금리로 빌린 돈의 만기가 돌아온다. 대출을 갱신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자를 감당했던 기업과 가계도 시간이 지나면서 현금흐름의 한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위기는 영화 속 디스토피아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회 전체가 붕괴하는 모습일 필요가 없다.
사회의 몇 퍼센트만 버티지 못해도 충분하다.
몇 퍼센트의 투자자가 반대매매를 당하고, 몇 퍼센트의 집주인이 급매물을 내놓고, 몇 퍼센트의 자영업자가 폐업하며, 몇 퍼센트의 기업이 부도를 맞으면 그것으로 시장가격이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다.
가격은 버티고 있는 다수보다 당장 팔아야 하는 소수가 결정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급매가 주변의 시세가 되고 경매가격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금융회사는 담보가치 하락을 보고 대출 기준을 강화한다.
그러면 애초에 부실하지 않았던 사람도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다.
소비는 줄어든다.
기업은 투자를 미룬다.
사람들은 집을 사지 않고 사업을 시작하지 않는다.
빚이 많은 사람은 시간이 두렵고 현금이 많은 사람은 더 낮은 가격을 기다린다.
경제가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분위기는 전혀 평화롭지 않다.
그리고 경제의 긴장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정치의 긴장이 된다.
채무자를 도울 것인가.
금융회사를 살릴 것인가.
부동산 가격을 지킬 것인가.
물가를 잡기 위해 높은 금리를 유지할 것인가.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내릴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혜택을 받고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한다.
경제 문제가 세대 갈등과 계층 갈등, 채권자와 채무자의 갈등으로 번지는 이유다.
그래서 지금 세계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은 단순한 막연한 불안만은 아니다.
세계는 지금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들을 동시에 원하고 있다.
중국 의존도는 낮추고 싶지만 중국이 만들어내던 저렴한 상품은 원한다.
러시아를 제재하고 싶지만 안정적인 에너지는 필요하다.
중동에 깊이 개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호르무즈 해협은 안전하기를 바란다.
제조업을 자국으로 가져오고 싶지만 상품가격은 오르지 않기를 원한다.
국방비와 산업보조금은 늘리고 싶지만 세금과 국채금리는 낮기를 바란다.
국경을 강화하면서도 세계화가 제공했던 효율성은 그대로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동시에 얻기는 어렵다.
특히 미국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화가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미국의 경쟁국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만이라면 이것은 세계화 체제 내부의 갈등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계화를 설계했던 미국 자신이 규칙을 고치고 있다.
국경을 낮추는 데 앞장섰던 나라가 물리적 국경을 강화한다.
자유무역을 강조했던 나라가 관세를 산업정책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세계 어디에서 생산하든 가장 효율적인 곳에서 생산하라고 했던 나라가 미국 안에서 생산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려 했던 세계가 다시 경제를 국가안보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세계화가 과거형이 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인지도 모른다.
세계화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계속 교역할 것이고, 삼성과 애플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품을 생산할 것이다. 국제금융시장도 계속 연결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존재한다는 것과 세계화가 시대의 방향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한때 세계는 더 많은 교역, 더 긴 공급망, 더 낮은 국경을 향해 움직였다.
지금은 더 짧은 공급망, 더 많은 재고, 더 많은 국내생산, 더 강한 국경, 더 명확한 동맹을 향하고 있다.
세계화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다.
점점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마치 ‘사랑한다’가 어느 순간 ‘사랑했었다’가 되는 것처럼, 단어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시제가 바뀌었다.
세계화가 끝난 것은 아니다.
세계화가 과거형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