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은 1978년에 태어나지 않았다 — 禮에서 공산주의까지, 중국은 옷을 갈아입었다

중국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만으로 이해하면 역사 전체를 지나치게 짧게 보게 된다. 중국의 통치 이념은 주나라의 예, 춘추전국의 제자백가, 진의 법가, 한 이후의 유가, 중국화된 불교와 성리학, 근대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바뀌었지만, 거대한 인구와 농업 잉여, 시장과 물류망, 중앙집권적 국가 운영 경험이라는 기반은 오래 지속되었다. 특히 송대 전후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비농업 인구와 전문 수공업을 부양할 수 있게 되면서 중국은 비단·도자기·금속제품 등을 대량 생산하는 거대한 실물경제로 발전했고, 그 생산력은 유목국가에 지급하는 세폐가 되기도 하고 세계의 은을 끌어들이는 수출품이 되기도 했다. 현대 중국의 제조업 부상은 아무것도 없던 곳에 공장을 만든 사건이라기보다, 오래된 실물생산 기반이 개혁개방을 통해 현대적 기술·자본·세계 공급망과 다시 결합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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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이해할 때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공산주의도, 개혁개방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경제권의 역사에서 보면 하나의 시대적 운영방식이다.

중국의 역사를 길게 보면 통치 이념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주나라에는 예(禮)를 중심으로 한 질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춘추전국시대의 경쟁 속에서 무너졌고, 수많은 사상과 통치 방식이 경쟁했다. 진은 법가적 통치기술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최초의 강력한 중앙집권 제국을 만들었다.

진이 무너진 뒤 한나라는 처음부터 순수한 유가국가였던 것도 아니다. 전한 초기에는 황로사상의 영향이 강했고, 무제 때 동중서 이후 유교가 국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유교 역시 주나라의 예질서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제국 통치에 맞게 다시 가공된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불교라는 외래 사상을 받아들였다. 불교는 중국 사회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 도가적 개념과 중국의 가족윤리, 정치질서 속에서 다시 해석되었다. 그 결과 중국식 불교가 만들어졌고, 다시 유교와 불교와 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었다.

송대에 이르면 주희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불교와 도교의 문제의식까지 흡수하면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교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 역시 한대 유교와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명·청대의 국가질서를 지탱한 유교는 이미 여러 차례 변형되고 재구성된 유교였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왕조체제 자체가 무너졌다.

공화주의와 민족주의가 들어왔고, 다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가 들어왔다. 중국공산당은 그것을 중국의 농민사회와 혁명전쟁의 현실에 맞게 다시 변형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계획경제와 집단화가 중심이 되었고, 덩샤오핑 이후에는 같은 공산당이 시장, 민간기업, 외국자본을 대규모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중국의 역사를 보면 사상은 고정된 본체라기보다 시대마다 국가가 현실에 맞게 다시 입는 옷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주례에서 법가로, 법가적 제국에서 유가적 제국으로, 불교를 흡수한 유교로, 성리학으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바뀌었다.

통치 이념은 크게 바뀌었지만 그 아래에는 더 오래 지속된 구조가 있었다.

넓고 연결된 농업지대, 거대한 인구, 수운과 육상교통망, 촘촘한 시장,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운영해 온 경험, 그리고 그 거대한 인구를 먹이고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야 한다는 국가의 숙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생산성이 상승하기 시작한 이후다.

중국은 처음부터 세계의 공장이었던 것이 아니다. 단순히 인구가 많다고 세계의 공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토지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농업 잉여가 늘고, 그 잉여가 도시인구와 전문 수공업자를 부양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농업에서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을 만드는 데 매달릴 필요가 줄어들어야 더 많은 사람이 비단을 짜고, 도자기를 굽고, 철을 만들고, 배를 만들고, 상품을 운송하고 거래할 수 있다.

송대 전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남 개발, 벼농사 발전, 이모작 확대, 수리시설 개선 등으로 토지생산성이 올라갔다. 농업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더 많은 비농업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시와 시장이 성장했다.

그 위에서 수공업의 전문화와 분업이 확대되었다.

비단은 농가의 부업 수준을 넘어 전문적인 생산망을 형성했고, 도자기는 경덕진 같은 거대한 생산집적지를 만들었다. 철 생산과 조선, 제지, 인쇄도 발전했다. 수운망은 이런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단순히 인구가 많은 농업국가가 아니라 거대한 실물생산체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중국의 ‘세계의 공장’은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농업 잉여가 충분히 축적되고, 그 잉여가 전문화된 제조업과 상업을 떠받칠 수 있게 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 중국의 제조업을 오직 ‘공산당이 개혁개방을 잘해서 만들어낸 결과’로만 보면 역사가 너무 짧아진다.

송대 이후 중국은 이미 오랫동안 거대한 생산경제였다.

북방 유목국가에 군사적으로 밀릴 때조차 중국이 내놓은 것은 자신이 생산한 것이었다. 송은 요·서하·금과의 관계에서 비단과 은을 세폐로 지급했다. 군사적으로는 열세에 놓일 수 있었지만, 그 세폐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실물생산력은 중국 농업과 수공업에서 나왔다.

몽골은 아예 중국을 정복했다.

그러나 몽골이 중국의 생산력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의 농업·수공업·상업 생산력을 거대한 몽골 제국의 경제망 안으로 편입했다.

명에서 한족 왕조가 다시 등장한 뒤에도 같은 생산기반은 계속 성장했다.

16~17세기에는 일본과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막대한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 은은 아무 이유 없이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중국이 비단과 도자기, 직물과 각종 수공업품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다.

은광에서는 광석을 캐고 제련해야 했고, 중국에서는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고 비단을 짜며 흙을 정제하고 도자기를 빚고 가마에서 구워야 했다.

세계무역은 결국 서로 다른 지역의 노동과 생산물을 교환하는 과정이었다.

청대에도 중국의 생산기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8세기까지 중국은 거대한 농업경제와 수공업 생산력을 유지했고, 차·비단·도자기 같은 중국 상품을 사기 위해 유럽의 은이 계속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

중국의 정치적·군사적 지위는 시대마다 크게 변했다.

유목민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기도 했고, 몽골과 만주족에게 지배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자가 누구인가와 중국 본토에서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랫동안 중국의 강점은 실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문제는 실물생산력이 반드시 군사적 패권이나 금융 패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송은 부유했지만 북방 기병국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명은 막대한 상품을 생산해 세계의 은을 끌어들였지만, 그 국제결제수단인 은 자체를 마음대로 공급할 수는 없었다.

청은 거대한 생산경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혁명을 통해 석탄과 증기기관, 기계공업을 결합한 서유럽과 마주쳤다.

19세기의 충격은 그래서 단순히 ‘가난한 중국이 부유한 서양에게 패배한 사건’으로 보면 안 된다.

오히려 거대한 전통적 생산경제가 기계공업·금융·해군·과학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산업국가를 만난 사건에 가까웠다.

중국은 여전히 많은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물건을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중국은 다시 세계 제조업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외국 기업의 상품을 조립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세계 제조업의 공급망을 담당하면서 부품 생산, 공정관리, 기계제작, 연구개발, 제품설계까지 흡수했다.

여기에서 개혁개방의 의미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개혁개방이 아무것도 없던 중국에 제조업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개혁개방은 오랫동안 거대한 인구와 생산 경험을 가진 중국을 다시 세계시장과 연결하고, 그 생산력을 현대적 공업체계 안에서 폭발적으로 증폭시킨 사건에 가깝다.

과거 중국이 비단과 도자기를 만들어 세계의 은을 끌어들였다면, 오늘날 중국은 전자제품·기계·자동차·화학제품·생활용품을 만들어 세계의 에너지와 원자재를 끌어들인다.

과거에는 자신이 발행할 수 없는 은을 받아야 했다.

오늘날에는 어떤 교역에서는 위안화로 자원과 상품을 사고, 상대국은 그 위안화로 다시 중국이 생산한 실물을 구매할 수 있다.

실물생산력이 자기 통화의 사용가치까지 뒷받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 중국의 부상은 1978년에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주나라의 예에서 진의 법가로, 한의 유교에서 중국화된 불교와 성리학으로, 다시 공산주의와 시장사회주의로 통치의 언어는 계속 바뀌었다.

왕조도 바뀌었다.

지배민족도 바뀌었다.

경제제도도 바뀌었다.

그러나 더 긴 시간축에서 보면 계속 반복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거대한 인구가 어떻게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할 것인가.

그 잉여를 어떻게 전문화된 제조업으로 바꿀 것인가.

그 제조업을 어떻게 국가재정과 군사력과 기술력으로 전환할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만든 물건의 교환조건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중국의 현대사를 개혁개방에서 시작하면 마지막 장만 읽는 셈이다.

통치 이념은 역사를 바꾼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는 그때그때의 통치 이념보다 훨씬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