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협천자와 세종 행정수도, 대한민국의 다음 중앙은 어디인가?
후한 말 조조가 실권을 잃은 헌제를 확보해 ‘협천자’의 효과를 누렸던 것은 권력이 군사력뿐 아니라 사람들이 중앙으로 인정하는 제도와 장소에도 축적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대 한국에도 황제는 없지만 대통령실·국회·중앙부처가 모인 수도는 비슷한 의미의 정치적 중심성을 가진다. 세종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은 어느 한 정부에서 갑자기 시작된 정책이 아니라 수십 년간 행정기관과 도시 인프라가 이동하며 축적되어 온 과정이며, 장기화된 분단으로 서울을 수도로 만들었던 지정학적 조건 역시 달라졌다. 수도의 수명이란 도시 자체의 수명이 아니라 그곳을 수도로 만들었던 조건의 수명일 수 있다. 따라서 행정수도 이전의 본질은 건물과 공무원을 어디로 옮기느냐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다음 정치적 중심을 어디에 형성할 것인가에 있다.
삼국지를 다시 읽다 보면 조조의 성공을 설명하는 가장 강렬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협천자(挾天子)’다.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맞아들여 황제를 등에 업었다. 당시 헌제에게 실질적인 군사력은 거의 없었다. 황제의 명령만으로 원소나 유표 같은 군벌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조조에게 헌제는 엄청난 자산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황제 개인의 힘이 아니다. 황제라는 자리가 가지고 있던 힘이다.
후한 말 중앙정부가 사실상 붕괴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황제가 관직을 임명하고 천하의 질서를 승인한다고 생각했다. 군벌들은 자기 힘으로 지역을 차지하고 군대를 거느렸지만, 황제로부터 어떤 관직을 받았는지에도 신경을 썼다. 황제에게 실제 군대가 없다는 사실과 황제의 이름이 정치적 효력을 가진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했다.
조조는 바로 그 틈을 장악했다.
그는 헌제를 통해 자신을 수많은 군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중앙정부를 대표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다른 군벌과 싸울 때도 단순한 군벌 간의 사투가 아니라 황제와 조정을 둘러싼 정치의 형태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관도대전에서 오소를 습격하는 것과 같은 조조의 과감한 승부수가 여러 차례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승부수를 던지기 전까지 판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힘 가운데 하나가 협천자였다.
이 점에서 나는 현대의 수도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오늘날에는 황제가 없다. 민주공화국의 권력은 헌법과 선거에서 나온다. 따라서 고대의 천자와 현대의 수도를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이 사람에게만 존재하지 않고 제도와 장소에도 축적된다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 만한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실, 국회, 중앙행정기관, 사법기관, 언론사, 금융기관, 대기업 본사가 한 공간에 모이면 그곳에는 단순한 인구 이상의 힘이 생긴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고, 정보를 얻기 위해 그곳을 바라보고, 기업과 인재가 다시 그곳으로 모인다. 오랜 시간 반복되면 그 도시는 국가의 중심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서울의 힘도 그런 축적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수도 이전을 단순히 몇 개 정부 부처를 옮기는 문제로 이해해서는 부족하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국가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의 행정수도 논의는 어느 한 정부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세종시에 중앙행정기관이 이전했고 도시와 교통망, 주거와 업무시설이 형성됐다. 국회와 대통령 기능의 이전 문제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이미 상당한 시간과 자본이 투입됐고 새로운 도시를 둘러싼 경제적 이해관계도 형성됐다.
이런 변화는 한 번 시작되면 단순히 정치적 구호만으로 되돌리기 어렵다. 행정기관이 이동하면 공무원이 이동하고, 관련 기업과 서비스가 따라간다. 교통망과 주택이 만들어지고 다시 새로운 이해관계가 발생한다. 행정수도 이전은 하나의 결정이라기보다 수십 년에 걸친 축적 과정에 가깝다.
여기에는 남북관계라는 공간적 변화도 있다.
서울은 조선왕조의 수도였고 이후 대한민국의 수도가 됐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이 실제로 통치하는 국토의 형태는 조선왕조나 한반도 전체를 전제로 했던 시대와 다르다.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서울은 대한민국 영토의 북쪽에 치우친 거대한 도시가 됐다.
물론 서울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경제·문화·인구 중심지다. 따라서 서울이 더 이상 대한민국의 중심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말할 수는 있다.
서울을 수도로 만들었던 지정학적 조건과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이 더 이상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다.
수도에는 어느 정도 수명이 있다는 말을 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한다. 도시가 늙으면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수도를 선택했던 당시의 조건에도 수명이 있다는 뜻이다.
역사를 보면 수도는 영원하지 않았다. 영토가 확대되거나 축소됐고, 주요 교통로가 바뀌었으며, 군사적 위협의 방향도 달라졌다. 경제의 중심과 인구의 분포가 달라지면서 과거에는 최적이었던 수도가 새로운 국가 구조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따라서 수도 이전을 판단할 때에도 “서울이 좋은가, 세종이 좋은가” 정도의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국토 구조를 가져야 하는가. 수도권에 집중된 정치·경제·인구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분단이 장기화된 국토에서 중앙의 위치는 어디여야 하는가. 대통령과 국회와 행정부가 어디에서 일할 때 국가 전체의 공간 구조가 달라지는가.
이런 질문이 먼저 나와야 한다.
여기서 다시 헌제가 떠오른다.
헌제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있는 곳은 여전히 중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조는 그것을 이해했고 그 상징적 중심성을 현실의 정치력으로 바꾸었다.
현대 국가에서는 과정이 반대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법률과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서울이 수도로 남아 있더라도 행정부가 세종에서 움직이고, 국회가 세종에서 활동하며, 대통령의 주요 국정 운영까지 세종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실제 정치의 중심은 서서히 이동할 수 있다.
처음에는 “수도는 서울인데 행정부가 세종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지나면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 대부분이 세종에서 이루어지는데 왜 수도는 서울인가.”
그때 수도 이전은 선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상당 부분 이루어진 현실을 제도적으로 확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의 행정수도 이전은 어쩌면 전통적인 의미의 ‘천도’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도를 먼저 선언하고 국가기관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기능을 수십 년 동안 조금씩 이동시킨 뒤 결국 중심의 위치가 바뀌는 방식이다.
조조의 협천자가 보여주는 역사의 흥미로운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권력은 반드시 가장 강한 군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중앙이라고 인정하는 제도와 장소에도 권력이 축적된다.
그리고 그 중심을 누가 차지하고,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현실의 권력관계도 달라진다.
황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중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진짜 질문도 건물 몇 채를 어디에 짓느냐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다음 중앙은 어디인가.
그 질문이 오히려 행정수도 논쟁의 본질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