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구조조정과 트럼프의 위험한 눈대중
미국은 이제 모든 지역을 과거처럼 직접 책임질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고,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NATO 방위비 압박, 인도·태평양 집중은 그런 구조조정의 일부다. 문제는 무엇을 줄이느냐에 따라 패권의 기반까지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동맹, 해외주둔, 자유항행 보장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투자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과의 경쟁을 위해 자원을 아껴야 하는 시점에 이란·이스라엘 문제로 다시 중동에 깊이 개입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장기 전략보다 트럼프 개인의 즉흥적 판단이 앞서는 모습은 위험하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지출 축소가 아니라 무엇이 비용이고 무엇이 자산인지 구분해 패권 유지비를 정교하게 재배분하는 일이다.
절약하다 패권을 잃을 수도 있다
형편이 어려워진 가정은 지출부터 줄인다.
외식을 줄이고 여행을 미루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정이 더 나빠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자녀의 교육비도 줄여야 할까. 보험료는 아껴도 될까. 이발비가 아깝다고 집에서 머리를 자르면 당장 몇 만 원은 절약할 수 있지만, 단정한 용모가 직업과 사회생활에서 만들어내는 가치는 장부에 찍히지 않는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워질수록 오히려 계산은 더 정교해야 한다.
같은 지출이라도 소비가 있고, 보험이 있고, 미래 소득을 위한 투자가 있다. 당장 돈이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잘라내다 보면 통장 잔고는 잠시 늘어도 가정의 미래는 더 가난해질 수 있다.
지금 미국이 그런 시기에 들어섰다.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개입할 수 있는 나라였다. 유럽에서는 소련과 러시아를 막았고, 중동에서는 에너지 수송로와 동맹국을 지켰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태평양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도 모든 곳에 예전과 같은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이라는 경쟁자가 등장했고 재정 부담은 커졌다. 유럽과 중동을 동시에 관리하면서 인도·태평양에서 중국까지 억제해야 한다. 돈뿐만 아니라 군함과 미사일, 병력과 외교력도 무한하지 않다.
결국 미국 역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그 변화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철수의 방식과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미국이 20년 동안 유지해온 전장에서 더 이상 같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의미는 컸다. 그 결정의 출발은 트럼프 1기였고 최종 철수는 바이든이 실행했다. 정권이 달라도 미국의 전략적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이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트럼프가 NATO 국가들에 더 많은 방위비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이 자기 방위에 더 많은 돈을 쓰고, 미국은 중국이라는 가장 큰 경쟁자에게 더 많은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유럽의 부담을 유럽에 넘기고, 중동 국가들에게도 자기 지역 안보를 더 많이 맡긴다. 그렇게 확보한 돈과 무기와 군사력을 인도·태평양에 집중한다.
여기까지는 하나의 전략이다.
문제는 세계지도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동에는 미국이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지워버릴 수 없는 나라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게 이란은 단순한 지역 경쟁자가 아니다. 국가의 장기적인 안보와 생존에 관한 문제다. 따라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란의 핵시설뿐 아니라 군사력과 지도부, 나아가 체제 자체가 약해지는 것도 전략적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계산은 달라야 한다.
미국 대통령은 이란만 바라볼 수 없다.
중국을 봐야 하고 러시아를 봐야 한다. NATO도 유지해야 하고 동아시아의 동맹도 관리해야 한다. 국제유가와 금융시장을 봐야 하고, 미군의 미사일 재고와 방산업체의 생산능력까지 계산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어도 항상 같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아니다.
이번 이란전쟁에서 가장 위험했던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전쟁의 끝과 미국이 감당할 수 있는 전쟁의 끝이 같은지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전쟁에 깊숙이 들어갔다.
그런데 중동에는 이스라엘만큼은 아니더라도 미국에게 대단히 민감한 또 하나의 나라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는 단순한 우방국이 아니다.
세계적인 산유국이자 OPEC의 핵심 국가이고, 국제유가가 흔들릴 때 공급을 조절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수십 년 동안 안보와 석유, 무기와 투자, 금융을 서로 연결해 왔다.
사우디의 석유 때문에 달러 패권이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러나 사우디가 이른바 '오일머니'의 가장 상징적인 국가이며, 중동에서 창출된 막대한 에너지 자본이 달러와 미국 금융시장으로 환류되어 온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미국 중동전략의 안보적 예외라면, 사우디는 에너지와 자본의 예외에 가깝다.
사우디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중동의 한 동맹국을 잃는 문제가 아니다.
국제유가와 걸프의 세력균형이 흔들리고, 중국이 그 빈자리에 들어올 가능성이 커진다. 사우디가 미국의 안보보장을 덜 신뢰하게 된다면 중국과의 경제·외교 관계를 더 넓히고, 이란과도 별도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려 할 것이다.
패권국이 한 발 물러나면 그 자리가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들어온다.
그래서 미국이 중동에서 얼마를 절약할 것인지를 계산할 때는 철수로 줄어드는 비용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중국이 얼마나 싸게 영향력을 얻는지도 함께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이란은 바로 이 딜레마를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란이 미국과 정면으로 군사력을 겨뤄 이길 가능성은 없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전투기, 미사일 전력을 같은 방식으로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
그러니 다른 것을 공격한다.
미국이 지키려면 비싸고, 버리면 더 비싼 곳을 때린다.
대표적인 곳이 호르무즈 해협이다.
호르무즈를 틀어막으면 미군 함정을 침몰시키지 않아도 세계 유가가 움직인다. 유가가 오르면 미국의 휘발유 가격과 물가가 영향을 받고 금융시장까지 흔들린다. 중동의 군사적 문제가 미국 국민의 생활비 문제로 바뀐다.
전쟁의 비용이 테헤란과 걸프에서 끝나지 않고 워싱턴의 정치로 들어오는 것이다.
사우디와 걸프 국가들의 에너지 시설을 위협하는 것도 같은 효과를 낸다.
사우디의 석유시설이 공격받으면 미국은 난처해진다.
모른 척하면 미국의 안보보장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
보호하려면 다시 방공체계를 보내고 함정을 배치하고 미사일을 소비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중동에서 아끼려고 했던 바로 그 자원을 다시 중동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비슷하다.
미국이 완전히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란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란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거나 미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 호르무즈와 걸프의 에너지 인프라처럼 미국이 외면하기 어려운 지점을 계속 흔드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에는 선택지가 생긴다.
이스라엘을 지킬 것인가.
사우디를 지킬 것인가.
호르무즈의 자유항행을 지킬 것인가.
걸프의 유전을 지킬 것인가.
그렇다면 돈과 미사일과 군함을 다시 중동에 투입해야 한다.
반대로 그 비용이 아까워 물러난다면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해온 동맹의 신뢰와 지역 영향력을 포기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미국이 값을 치른다.
이것이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상대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전략이다.
미국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 계속 비싼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일수록 미국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즉흥적인 결단력이 아니다.
훨씬 더 정교한 우선순위다.
중국과의 장기 경쟁을 위해 유럽의 부담을 줄이겠다면 어디까지 줄일 것인지 정해야 한다.
중동에서 빠져나오겠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방위공약과 이스라엘이 원하는 전쟁의 범위를 어디에서 구분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사우디를 지켜야 한다면 그것이 단순히 원유 때문인지, 걸프의 세력균형 때문인지, 중국 견제와 금융질서까지 포함한 것인지 정확히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이란과 전쟁한다면 무엇을 얻었을 때 전쟁을 끝낼 것인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정했어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에게서는 이런 계산보다 순간적인 판단이 앞서는 장면이 반복됐다.
이란 지도부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동시에 협상을 기대했다.
정권의 운명을 거론하다가 핵 프로그램이 목표가 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호르무즈 해협의 재개방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됐다.
동맹국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고 미국 내부에서도 전쟁의 목표에 대한 합의가 약했다.
급기야 호르무즈에서 미국이 통행료를 받겠다는 식의 발언까지 나왔다가 다시 물러섰다.
문제는 말 한마디의 실수가 아니다.
상대도 미국을 관찰한다.
강한 경고를 했다가 연기하고, 군사행동을 이야기했다가 협상으로 돌아오고, 다시 시한을 주고 또 조건을 바꾸는 일이 반복되면 이란도 학습한다.
첫 번째 위협에 바로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조금 더 버티면 미국 내부에서 유가가 문제가 되고, 무기 재고가 문제가 되고, 동맹국의 불만이 나오고, 반전 여론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의 문제는 트럼프에게 전략이 전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미국의 큰 전략은 오히려 비교적 선명하다.
모든 지역을 과거처럼 직접 책임지는 대신 동맹국의 부담을 늘리고, 미국의 자원을 가장 중요한 경쟁자인 중국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거대한 구조조정을 실행하는 방식이다.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공장을 정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회장이 재무제표와 공급망을 보지 않고 눈대중으로 공장을 하나씩 닫는다면 문제가 된다.
당장은 비용이 줄어든다.
그런데 폐쇄한 공장이 핵심 부품을 만들던 곳이었다면 나중에는 훨씬 비싼 돈을 들여 그 부품을 다시 사와야 한다.
미국의 동맹도 그렇다.
해외 미군기지도 돈이 들고, 항공모함도 돈이 들며, 동맹국에 제공하는 방위공약도 비용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자산을 만든다.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 미국이 온다.'
그 믿음이다.
이 믿음 때문에 다른 국가들은 미국과 정보를 공유하고, 미국 무기를 구매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 동참하며,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일정한 선을 의식한다.
이 신뢰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다.
그래서 삭감하기 쉽다.
주둔비를 줄이면 얼마를 절약했는지는 바로 계산된다.
하지만 동맹국이 미국을 덜 믿게 됐을 때 미국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는 그해 예산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달러의 힘도 비슷하다.
달러 패권은 미군이 세계 곳곳에 주둔하기 때문에 단순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경제의 규모와 금융시장의 깊이,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훨씬 직접적인 기반이다.
하지만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동맹망, 해상교통로를 보호하는 능력이 그 신뢰와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다.
패권이란 결국 여러 종류의 신뢰가 겹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지출을 줄이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지출과 함께 신뢰까지 잘라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국이 과거보다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된 지금이 더 정교해야 할 때다.
돈이 넘칠 때는 몇 번의 잘못된 선택을 감당할 수 있다.
여유가 줄어들었을 때는 하나의 판단 착오가 다른 영역의 선택까지 제한한다.
중동에서 사용한 미사일은 태평양에서 사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한 방공전력은 동시에 다른 지역에 있을 수 없다.
걸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추가로 사용하는 정치적·군사적 자원만큼 중국을 억제할 여유는 줄어든다.
그러니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돈도, 더 강한 대통령도 아니다.
무엇이 소비이고 무엇이 보험인지, 무엇이 낭비이고 무엇이 패권을 떠받치는 자산인지 구별하는 능력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버릴 수 있었다.
유럽에는 더 많은 부담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우디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호르무즈는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쟁에 필요한 힘을 어떻게 남겨둘 것인가.
이것이 지금 미국이 풀어야 할 문제다.
이란은 이미 이 질문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미국의 가장 강한 곳을 공격하지 않는다.
미국이 지키려면 비싸고 버리면 더 비싼 곳을 흔든다.
그럴수록 미국에는 정교한 계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 계산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보다 트럼프 한 사람의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미국은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그 자체가 미국 패권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
진짜 위험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포기해도 되는지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형편이 어려워진 집이 교육비와 외식비를 구분하지 못하면 가난은 더 빨리 찾아온다.
패권국의 살림살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