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기축통화의 무게, 미국 제조업과 국채시장이 흔들리는 이유

미국은 달러 기축통화 지위를 통해 막대한 금융·외교적 힘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달러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 제조업 공동화라는 부담도 떠안았다. 스티븐 미란의 보고서는 이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달러 패권은 유지한 채 관세·안보우산·장기국채 등을 통해 그 비용을 동맹과 교역국에 나누어 부담시키자는 해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세계에 반드시 하나의 절대적인 기축통화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달러의 역할이 여러 통화와 금으로 분산된다고 세계무역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이 제조업을 되살리고 막대한 부채를 관리하며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 시점에 달러 패권까지 현재 모습 그대로 지키려다 동맹의 신뢰와 미국 자신의 실물경제를 훼손한다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것이다. 달러가 미국을 강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강한 미국이 달러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달러 패권이 지나치게 무거워진 순간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모든 비용을 남에게 떠넘기며 왕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그 무게를 조금 내려놓고 달러 패권이 약해져도 강한 미국을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미란 역시 자신의 구상이 미국에 대한 노출 축소와 대체 준비자산 탐색을 촉진할 위험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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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무거우면 내려놓게

미국은 요즘 달러 때문에 고민이 많다.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달러를 보유하고, 국제무역의 상당 부분이 달러로 결제되고, 금융기관은 미국 국채를 가장 중요한 안전자산 가운데 하나로 사용한다.

오랫동안 이것은 미국의 특권으로 여겨졌다.

미국은 자국 통화로 빚을 낼 수 있다.

세계가 미국 국채를 사고 싶어 한다.

전쟁이 나고 금융위기가 생겨도 달러를 찾는다.

그리고 달러 금융망을 이용하면 군대를 보내지 않고도 다른 나라를 제재할 수 있다.

이보다 좋은 패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최근 미국 내부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달러 패권은 혜택만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 제조업을 약하게 만들고, 무역적자를 구조적으로 확대하며, 세계 경제가 커질수록 미국이 감당해야 할 부담까지 커진다는 주장이다.

스티븐 미란이 2024년 작성한 『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문서의 출발점은 중국도 아니고 관세도 아니다.

달러다.

미란은 세계가 달러와 미국 국채를 준비자산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달러가 구조적으로 고평가되고, 그 결과 미국 수출은 비싸지고 수입은 싸져 제조업이 피해를 입는다고 본다. 세계 경제가 성장할수록 준비자산 수요가 늘고, 그것을 공급하는 미국이 감당해야 할 부담도 커진다는 것이다.

논리는 트리핀 딜레마로 이어진다.

기축통화국은 세계에 준비자산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미국 국채와 달러를 해외에 공급한다.

그 반대편에서 미국은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낸다.

미란은 미국이 수입을 많이 하기 때문에 경상적자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준비자산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수입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이다.

그리고 현재 미국이 왜 제조업을 다시 가져오려고 하는지도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물건을 샀다.

달러를 내줬다.

외국은 그 달러로 미국 국채와 금융자산을 샀다.

돈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소비자는 값싼 공산품을 얻었다.

미국 기업은 금융과 기술, 브랜드와 설계에 집중했다.

중국은 생산을 맡았다.

그 시스템은 한동안 놀라울 정도로 잘 작동했다.

문제는 중국이 계속 공장으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생산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공급망을 만들었다.

숙련인력을 길렀다.

장비를 만들었다.

소재를 만들었다.

배터리를 만들었다.

전기차를 만들었다.

조선소를 키웠다.

그리고 이제 미국이 중국과 전략적 경쟁을 시작하면서 과거에는 효율적이었던 분업이 국가안보의 위험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미국은 깨달았다.

돈이 있다고 모든 것을 즉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장은 돈으로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산업생태계는 돈만으로 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리쇼어링이 시작됐다.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

전력망을 늘린다.

방위산업 생산능력을 키운다.

미국은 다시 물건을 만드는 나라가 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달러 패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조업까지 다시 가져올 수 있을까.


미란의 답은 가능하다는 쪽이다.

달러 패권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대신 그 비용을 미국 혼자 부담하지 말자는 것이다.

관세를 부과한다.

무역 상대국에 시장 개방을 요구한다.

방위비를 더 부담하게 한다.

중국과 거리를 두도록 압박한다.

미국의 안보우산과 미국 시장 접근권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다.

문서는 미국의 무역정책과 안보정책이 앞으로 더욱 밀접하게 결합될 것이라고 본다. 달러의 준비통화 지위를 유지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그 시스템에서 얻는 혜택의 일부를 미국이 회수하는 방향이다.

관세도 단순한 보호무역 수단이 아니다.

미국의 소비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가격이다.

안보우산의 가격이기도 하다.

중국과 얼마나 가까운지도 관세율을 결정할 수 있다.

NATO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는지, 미국의 제재에 협조하는지, 중국의 관세 우회를 돕는지까지 무역조건과 연결할 수 있다는 구상도 문서에 등장한다.

더 나아가 외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의 만기를 매우 길게 늘리는 구상까지 나온다.

달러를 약하게 만들어 미국 제조업을 살리고 싶다.

그런데 외국이 달러자산을 팔면 국채금리가 오른다.

그렇다면 외국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는 미국 국채를 장기채나 100년물 같은 형태로 바꾸게 하면 어떨까.

미국의 안보우산을 제공받는 국가가 미국의 장기 금융부담까지 나누어 가지라는 것이다.

논리는 일관돼 있다.

미국 시장도 공짜가 아니다.

미국의 안보도 공짜가 아니다.

달러라는 국제 공공재도 공짜가 아니다.

이제 다른 나라가 값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이해한다.

오히려 문제의식에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달러 패권이 미국 제조업에 아무런 비용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다.

미국이 세계 전체의 준비자산 수요를 감당하면서 영원히 대규모 경상적자를 유지하고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이미 막대한 규모다.

미국은 과거처럼 마음 놓고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축통화의 가장 큰 장점도 단순히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몇 퍼센트포인트 싸게 돈을 빌리는 데 있지 않을 수 있다.

미란도 미국의 진짜 장점은 낮은 금리라기보다 많은 국채를 발행해도 금리가 상대적으로 덜 올라가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그런데 바로 그 장치가 최근 말썽이다.

미국은 계속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기존 국채도 차환해야 한다.

복지비도 필요하다.

국방비도 필요하다.

AI에 투자해야 한다.

전력망도 깔아야 한다.

반도체 공장도 지어야 한다.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제조업도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런데 장기금리가 높아지면 그 모든 일이 비싸진다.

정부의 이자비용이 올라간다.

기업의 자본조달비용도 올라간다.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높아진다.

미국이 빚보다 빨리 성장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장에 필요한 돈의 가격이 올라간다.

그래서 미란 역시 달러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정책이 외국인의 국채 매도로 이어질 경우 장기금리가 상승할 수 있다는 위험을 반복해서 경고한다. 현재의 높은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 위험이 그 문제를 더욱 키울 수 있다고 본다.

문서의 마지막 결론도 자신만만하지 않다.

미국에 유리하게 국제통화와 무역질서를 재편할 길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길은 좁다.

정확한 계획과 세심한 집행, 금융시장 충격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더하고 싶다.

그렇게까지 해서 달러 패권을 지금 모습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기축통화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마치 세계경제에는 반드시 하나의 절대적인 기축통화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의 대부분의 역사가 지금과 같은 달러체제 아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통화는 언제나 존재했다.

파운드가 있었고 길더가 있었고 여러 지역의 결제통화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달러처럼 한 나라의 국채가 세계 준비자산의 중심이 되고, 세계 각국이 무역과 금융을 위해 그 나라의 자산을 대규모로 보유하는 체제가 인류 역사 전체의 당연한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달러가 지금보다 덜 중요한 세계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한국은 필요한 만큼 달러를 가진다.

유럽과 거래하기 위한 유로도 가진다.

중국과 거래하기 위한 위안도 일부 보유할 수 있다.

금도 가진다.

필요하면 중앙은행끼리 통화스왑을 맺는다.

기업들은 거래 상대방과 합의한 통화로 결제한다.

지금보다 비효율적일 수 있다.

환전비용도 늘어난다.

금융시장도 더 파편화될 수 있다.

하지만 세계무역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달러를 대체할 또 하나의 새로운 황제가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위안화가 달러를 완전히 대체할 필요도 없다.

유로가 달러가 될 필요도 없다.

달러의 몫을 여러 통화와 금과 지역 금융시스템이 조금씩 나누어 가져가면 된다.

달러가 1등 통화로 남더라도 지금보다 덜 절대적일 수 있다.

그것도 하나의 국제통화질서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국에게도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

미국은 지금 기축통화의 부담을 줄이고 싶어 한다.

강한 달러 때문에 제조업이 약해지는 것도 싫다.

거대한 무역적자도 줄이고 싶다.

중국에 의존하는 것도 싫다.

그런데 동시에 세계가 계속 달러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외국이 미국 국채를 계속 사주기를 원한다.

달러 금융망을 이용한 제재권도 유지하고 싶다.

동맹국도 미국 안보질서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결국 이렇게 된다.

기축통화의 비용은 줄이고 싶고, 기축통화의 혜택은 그대로 가지고 싶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관세가 등장한다.

방위비 분담이 등장한다.

장기국채가 등장한다.

외국 중앙은행에 부담을 떠넘기는 아이디어까지 등장한다.

달러 패권이 너무 무거워졌는데 내려놓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함께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이다.

나는 오히려 여기서 미국이 한 번쯤 생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거우면 조금 내려놓으면 된다.


달러의 세계 비중이 조금 줄어들면 어떤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줄어들면 어떤가.

세계가 미국 국채를 예전만큼 기계적으로 사주지 않으면 어떤가.

물론 미국은 불편해진다.

재정을 훨씬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국채를 발행한다고 세계가 무조건 받아주는 시대도 약해진다.

정부는 세금을 더 걷거나 지출을 줄여야 할 수 있다.

미국 국민도 지금보다 더 많은 저축을 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 달러를 세계에 공급하기 위해 영원히 거대한 무역적자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도 줄어든다.

제조업과 무역재 부문에 가해지던 부담도 약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진다.

“달러 패권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모든 문제가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의 문제가 된다.

동맹도 달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관세도 달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안보우산도 미국 국채를 사게 만드는 협상도구가 된다.

그러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기 쉽다.

달러가 미국을 만든 것이 아니다.

미국이 강했기 때문에 달러가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기업이 있다.

식량이 있다.

석유가 있다.

천연가스가 있다.

넓은 영토가 있다.

대학이 있다.

연구기관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자본시장이 있다.

군사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나라다.

달러는 그 힘의 결과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 제조업이 희생되어야 한다.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 계속 적자를 내야 한다.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 세계 안보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용이 너무 커지자 이제는 동맹국에게 관세와 안보를 연결해 부담을 넘기려 한다.

그 과정에서 동맹의 신뢰까지 잃는다면 과연 무엇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미란의 문서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이런 정책을 밀어붙이면 다른 나라들이 미국에 대한 노출을 줄이고 달러와 미국 자산의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미국의 힘을 너무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다른 나라는 그 힘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에서 벗어날 방법도 찾는다.

금융제재가 강력할수록 달러 밖의 결제망을 고민한다.

관세가 협박수단이 될수록 미국시장 의존도를 낮추려 한다.

안보우산이 협상카드가 될수록 자체 방위를 고민한다.

미국 국채 보유가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될수록 준비자산을 분산하려 한다.

힘을 사용하는 것과 힘의 기반을 보존하는 것은 항상 같은 일이 아니다.


미국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

중국과 경쟁해야 한다.

제조업을 다시 세워야 한다.

막대한 국가부채도 관리해야 한다.

AI라는 새로운 성장동력도 현실의 생산성과 세수로 연결해야 한다.

동시에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도 유지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어려운 과제다.

여기에 달러가 영원히 지금과 같은 절대적 기축통화여야 한다는 목표까지 반드시 넣어야 할까.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남는 것과 달러가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같은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둘이 충돌하는 순간도 올 수 있다.

그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답이 의외로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선택하면 된다.

달러를 위해 미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위해 달러가 존재한다.

달러 패권이 미국 제조업을 계속 약하게 만들고,

재정운영을 왜곡하고,

동맹국을 압박해야만 유지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의 신뢰까지 갉아먹는다면,

달러의 왕관을 조금 가볍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미국은 기축통화가 아니어도 강할 수 있는 나라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선택지가 더 많아질 수 있다.

패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움켜쥐는 것보다,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고 필요 없는 짐은 내려놓는 것이 강대국에게 더 어려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에 말하고 싶다.

달러가 너무 무겁다면,

세계 전체를 혼자 짊어지는 것이 너무 비싸졌다면,

그 무게 때문에 정작 미국의 제조업과 재정과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면,

꼭 끝까지 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미국, 무거우면 내려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