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에 취한 미국, 리모콘만 남았네
미국은 달러 패권을 바탕으로 세계의 생산물을 사들이며 제조업을 해외로 내보냈고, 금융·기술·브랜드·군사력 같은 고부가가치 영역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생산기반이 약해지면서 이제는 군함의 정비와 조선 능력까지 한국·일본 같은 동맹국에 의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를 리모콘으로 움직이던 미국이 정작 직접 만들고 고치는 능력은 잃어가는 역설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자였다. 달러를 찍어 물건을 사고, 세계는 그 달러를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미국이 적자를 내면 낼수록 세계에는 달러가 풀렸고, 그 달러는 다시 미 국채와 미국 금융시장으로 흘러들었다. 달러 패권은 그렇게 돌아갔다.
처음에는 꽤 근사한 거래였다. 굳이 비싼 공장을 미국에 둘 필요가 없었다. 옷은 중국에서 만들고, 전자제품은 아시아에서 만들고, 원자재는 남미와 중동에서 가져오면 됐다. 미국은 더 부가가치 높은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금융을 하고,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브랜드를 관리하고, 특허를 갖고 있으면 됐다.
쉽게 말하면 직접 물건을 만드는 대신 리모콘을 쥐는 쪽을 택한 것이다.
홈쇼핑에 앉아 버튼만 누르면 세계 곳곳에서 상품이 배달됐다. 달러라는 신용카드는 한도가 사실상 무제한인 것처럼 보였다. 값싼 상품이 쏟아져 들어왔고 소비자는 만족했다. 기업은 생산비를 낮췄고 주가는 올랐다. 생산시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은 낙후가 아니라 효율화라고 불렸다.
문제는 하나씩 내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다시 만들고 싶어도 만들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공장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공장이 사라지면 숙련공이 사라지고, 협력업체가 사라지고, 장비회사가 사라지고, 그 산업에 축적되던 암묵적인 기술도 함께 사라진다. 설계도와 자본만 가지고는 하루아침에 산업을 복원할 수 없다.
이 문제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조선업이다.
한때 세계 최대의 조선국이었던 미국은 이제 상선 건조에서 한국·중국·일본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산 기반이 축소됐다. 그런데 배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해군력을 유지하려면 새 함정을 만드는 능력뿐 아니라 기존 함정을 수리하고 정비하고 개조할 수 있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필요하다.
그 결과 이제 미국은 자신의 군함을 유지하는 데에도 한국과 일본의 조선 능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아이러니하다.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나라가 배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국의 조선소를 필요로 한다. 제조업을 해외에 맡겨도 금융과 군사력만 장악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라가 이제 군사력을 유지하는 생산 기반마저 해외에서 찾고 있다.
국방의 일부까지 외주화되는 셈이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미국의 몰락’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다른 나라의 생산 능력을 자기 동맹 체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미국이 가진 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조선소가 미군 함정을 정비하는 것도 미국 패권의 붕괴라기보다는 패권의 운영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그러나 분명한 위험도 있다.
리모콘은 강력하지만 리모콘 자체가 자동차를 만들지는 못한다. 금융은 공장에 투자할 수 있지만 숙련된 용접공을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없다. 인공지능은 설계를 도울 수 있지만 조선소의 도크를 대신할 수 없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엇을 직접 만들 것인가’보다 ‘누가 가장 싸게 만들어줄 것인가’를 물었다. 그 질문은 소비경제에서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국가안보에서는 전혀 다른 답을 요구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공급망은 가격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동맹국도 자국의 필요를 먼저 생각한다. 바다 건너 공장은 버튼을 누른다고 즉시 움직여주지 않는다.
미국은 이제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 반도체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고, 배터리와 핵심 광물 공급망을 재편하고, 조선업을 되살리려는 이유도 결국 같다.
홈쇼핑을 너무 오래 본 것이다.
소파에 앉아 리모콘 하나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TV를 끄고 집 안을 둘러보니,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은 리모콘을 내려놓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공장은 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사람과 기술이 필요하다.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많이 해외로 내보낸 것도 어쩌면 바로 그것들이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