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라는 역린, 세계가 기다리는 점잖은 미국

네타냐후의 유엔 연설 때 사우디 대표단이 퇴장한 장면은 미국 중심 질서의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우디는 미국의 오랜 안보 파트너이자 페트로달러 체제의 핵심 축이었지만, 이제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들조차 모든 사안에서 워싱턴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미국은 제조업의 해외 이전, 달러 패권과 금융제재의 과용, 정권교체와 군사압박의 반복적 성공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해왔고, 중국은 이런 미국의 압박을 받는 국가들에게 완전한 대체재는 아니더라도 두 번째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는 여전히 미국을 필요로 하지만 더 이상 무조건적인 추종을 약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이 지켜야 할 진짜 역린은 달러 그 자체가 아니라, 미국과 함께하는 편이 여전히 낫다고 믿게 만드는 신뢰이며, 앞으로 필요한 것은 힘을 더 세게 휘두르는 미국이 아니라 그 힘을 절제할 줄 아는 ‘점잖은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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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유엔총회 연단에 오르자 사우디아라비아 대표단도 자리를 떠났다. 사우디는 미국의 오랜 안보 파트너이자 1970년대 페트로달러 재순환 체제의 핵심 축이었다. 그런 사우디가 이스라엘 총리의 연설에 항의해 퇴장했다는 장면의 상징성은 작지 않다. 이것이 사우디의 반미 선언이나 미국 중심 질서와의 결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들도 더 이상 모든 사안에서 워싱턴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세계의 시선에도 물음표가 늘고 있다. 미국의 힘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그 힘을 어떻게 쓰는지를 세계가 더 까다롭게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 의구심의 한가운데에는 달러 패권이라는 미국의 역린이 있다. 달러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다. 미국 국채를 세계가 사게 만들고, 미국 금융시장으로 자본을 끌어들이며, 미국의 제재를 다른 나라의 기업과 은행까지 따르게 만드는 힘이다. 미국이 세계질서에서 누려온 군사적 우위와 경제적 우위를 연결해주는 핵심 수단 가운데 하나가 달러였다.

미국은 세계화 과정에서 제조업과 공급망의 상당 부분이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이동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값싼 생산비와 높은 기업 수익을 얻는 대신 실물 생산의 일부를 밖으로 내보냈지만, 달러와 금융시장, 기술과 동맹망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했다. 공장이 어디에 있든 세계가 달러로 거래하고 미국 금융망을 이용하는 한 중요한 규칙은 여전히 미국이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오랫동안 실제로 그렇게 작동했다. 큰 재정적자를 내도 국채는 팔렸다. 위기가 오면 오히려 세계의 돈이 달러를 찾았다. 금융제재를 가하면 미국 밖의 기업과 은행까지 움직였다. 달러라는 역린을 건드리는 것은 대부분의 국가에 너무 비싼 선택이었다.

문제는 성공이 너무 오래 지속됐다는 것이다. 미국은 달러 패권과 금융망이라는 강력한 카드가 있는 한 제조업의 약화나 늘어나는 부채도 상당 부분 감당할 수 있다고 믿기 쉬웠다. 제재와 2차 제재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상대국의 경제적 선택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유혹도 커졌다.

그러나 역린은 너무 자주 드러내면 약점이 되기도 한다. 달러 금융망을 이용한 압박이 거세질수록 제재받는 국가들은 달러를 피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미국의 금융질서에서 쫓겨날 위험이 커질수록 그 질서 밖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이유도 커진다.

외교에서도 비슷한 성공 경험이 있었다. 일본과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한 뒤 미국의 핵심 동맹이 됐다. 하지만 두 나라를 친구로 만든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때려눕혔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점령과 재건에 책임을 졌고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와 안보질서를 함께 만들었다.

그런데 결과만 기억하면 위험한 공식이 만들어진다. 충분히 압박하고, 충분히 강하게 때리고, 정권이나 제도를 바꾸면 결국 상대도 미국 중심 질서로 들어온다는 생각이다.

이란은 그 공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은 1953년 모사데크 정부 축출에 관여했고 이후 친서방적인 샤 체제가 강화됐다.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6년 뒤 이슬람혁명이 일어났고 이란은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의 대표적인 적대국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라크에서도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과 그 뒤 안정된 정치질서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몇 번의 성공이 하나의 방법을 영원한 법칙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제조업 공급망을 해외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은 성급했을 수 있다. 금융의 힘이 실물경제의 약점을 언제까지나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안일했다. 달러 패권의 이점을 누리면서 산업과 재정의 내실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면 나태했다. 강한 충격을 주면 적도 언젠가는 친구가 될 것이라고 일반화했다면 오류였다. 그리고 달러라는 역린을 지키기 위해 그 힘을 반복해서 휘둘러도 세계가 계속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과욕이었다.

이제는 중국이라는 존재가 있다. 중국은 아직 미국을 대신할 수 없다. 위안화는 달러를 대체할 국제통화가 아니고, 미국과 같은 금융시장이나 세계적 동맹망도 없다. 그러나 중국이 새로운 미국이 될 필요는 없다. 미국의 압박을 받는 국가가 완전히 고립되지 않게 해줄 정도면 충분하다.

석유를 사주고, 상품을 공급하고, 일부 거래를 위안화로 돌리고, 미국 금융망 밖에서 거래할 통로를 제공하면 된다. 첫 번째 선택지보다 좋은 두 번째 선택지일 필요도 없다. 두 번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미국의 압박이 작동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이란은 그 변화를 잘 보여준다. 미국의 제재가 강해질수록 중국 시장의 가치는 커졌다. 미국이 이란을 세계경제에서 고립시키려 해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남아 있으면 고립의 강도는 낮아진다. 미국이 달러라는 역린을 지키려 강하게 압박할수록, 역설적으로 상대국은 달러 밖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찾게 된다.

사우디 대표단이 네타냐후의 연설장에서 일어난 장면도 이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우디는 미국을 버린 것이 아니다. 중국 편에 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미국과 오랜 전략적 관계를 맺고 있고, 페트로달러 체제의 형성과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가조차 자신의 지역적 이해와 미국의 선택을 별도로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미국에 보내는 신호는 “당신은 필요 없다”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신이 하는 모든 선택에 자동으로 따라가지는 않겠다”에 가깝다.

그렇다고 세계가 미국을 떠날 준비가 끝난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역설이다. 미국에 대한 의구심은 커졌지만 미국을 대신할 완성된 질서는 없다. 중국은 미국의 압박을 피할 공간을 제공할 수 있지만 세계 금융과 안보체제를 통째로 대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세계가 원하는 것은 미국의 몰락이 아니라 미국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힘을 가진 미국이 아니라, 이미 가진 힘을 조금 더 점잖게 사용하는 미국이다.

점잖다는 말은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힘이 있어야 점잖을 수 있다. 때릴 수 있는데 한 번 더 협상하는 것이다. 제재할 수 있지만 그 제재가 자신이 만든 금융질서를 훼손할 가능성까지 계산하는 것이다. 동맹국에 더 많은 부담을 요구하면서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동맹과 달러 패권으로부터 얻은 이익을 기억하는 것이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보다 상대가 스스로 미국과 함께하는 편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을 더 큰 승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이 전후 세계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력과 달러만이 아니었다. 미국과 함께하는 것이 각국에도 이익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안보와 시장, 금융질서를 제공했고 그 대가로 달러의 지위와 자본의 유입, 거대한 동맹망이라는 이익을 얻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교환이었다.

미국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역린도 어쩌면 달러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미국과 함께하는 편이 여전히 낫다고 다른 나라들이 믿게 만드는 신뢰일 수 있다. 달러는 그 신뢰 위에서 강해졌고, 동맹 역시 그 믿음 위에서 유지됐다.

중국이라는 두 번째 선택지가 생긴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세계는 여전히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다만 예전보다 더 많은 의구심을 품은 채 바라본다.

미국은 아직 가장 많은 카드를 가진 국가다. 패권국의 성숙함은 그 카드를 모두 꺼내 보이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카드 가운데 무엇을 사용하지 않을지를 선택하는 데 있다.

달러라는 역린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모든 도전에 분노하며 더 강하게 휘두르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다른 나라들이 굳이 그 역린을 건드릴 이유가 없도록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세계가 아직 기다리는 미국의 리더십은 어쩌면 그런 ‘점잖은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