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보다 일자리, 대곡역이 던진 AI 시대 지역경제의 질문
대곡역 주민들이 “주택보다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AI 시대 지역경제가 마주한 더 큰 문제를 보여준다. 과거에는 기업과 공장을 유치하면 일자리가 생기고, 사람이 모이고, 주택·상권·학교·병원이 따라오는 비교적 단순한 공식이 작동했다. 그러나 AI와 자동화가 화이트칼라 업무의 생산성을 높이면서 서울조차 높은 부가가치를 유지한 채 사람을 덜 필요로 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 이런 시대에는 지역이 단순히 서울의 업무시설을 옮겨오는 것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투자액이나 첨단산업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과 협력업체, 소비와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는 경제를 만들 수 있느냐이다. 제조·로봇·설비·물류·의료·돌봄·인프라 관리처럼 물리적 세계와 연결된 산업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AI 시대 지역경제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뿐 아니라 ‘얼마나 오래 사람을 필요로 하느냐’에서 갈릴 수 있다.
경기도 고양시 대곡역 주변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뜻밖에도 주택이 아니다.
대곡역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 서해선에 GTX-A와 교외선까지 연결되는 수도권 서북부의 대표적인 교통 거점이다. 그러나 역세권 개발은 오랫동안 지연됐고, 최근 약 9400가구 규모의 개발계획에 더해 추가 공공주택 공급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주민들의 반응은 단순하다. 아파트보다 일자리와 산업시설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고양에는 많은 주택이 있다. 창릉지구를 비롯한 대규모 주택 공급도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대곡역마저 또 하나의 대규모 주거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집은 늘어나는데 일할 곳은 서울에 있고, 매일 아침 사람들이 철도를 타고 빠져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도시가 되는 것이다. 기사 속 주민들이 첨단산업과 업무시설 같은 자족기능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지역개발의 공식은 비교적 명확했다.
일자리를 만들면 사람이 온다. 사람이 오면 주택이 필요해지고, 상권이 형성되고, 학교와 병원과 서비스업이 따라온다. 공장 하나가 도시를 만들기도 했다. 울산과 포항, 창원과 구미 같은 산업도시들이 그렇게 성장했다.
그래서 지역이 쇠퇴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이야기했다.
기업을 유치하고, 산업단지를 만들고, 공공기관을 이전하고, 사무실을 옮기면 사람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이 공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인공지능 때문이다.
AI는 단순히 새로운 산업 하나를 추가하는 기술이 아니다. 기존 산업이 사람을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특히 변화가 빠른 곳은 사무직이다.
자료를 찾고, 문서를 작성하고, 계약서를 검토하고, 회계를 처리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광고를 기획하고, 고객을 상담하는 업무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미 AI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생산성은 높아질 수 있다. 매출도 늘어날 수 있다. 부가가치도 커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더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기업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변화는 지역경제에 생각보다 큰 질문을 던진다.
지역이 원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경제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는 서울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런 가능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서울은 앞으로 부유해지면서도 사람을 덜 필요로 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서울에는 본사와 금융, 전문서비스, 정보기술, 문화와 콘텐츠가 집중돼 있다. 이런 산업은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만 제조업처럼 반드시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AI가 그 생산성을 더욱 끌어올리면 서울의 경제적 중요성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커지면서도 그 경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구는 줄어들 수 있다.
그렇다면 대곡 주민들의 “일자리를 달라”는 요구는 과거와 조금 다른 의미로 읽어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서울의 일자리를 대곡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서울 자체가 앞으로 사람을 덜 필요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역균형발전은 어느 정도 서울의 일자리를 지방으로 옮기는 문제였다.
본사를 이전하고 공공기관을 내려보내고 산업단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서울의 사무직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울에 있던 1만 개의 일자리 가운데 2천 개를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으로 1만 개가 7천 개가 되는 상황에서 지역이 그 일자리 일부를 놓고 다시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
그 경쟁은 쉽지 않다.
기업 입장에서도 적은 사람으로 운영할 수 있다면 굳이 조직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킬 이유가 줄어들 수 있다.
그래서 AI 시대의 지역경제 정책은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해야 한다.
기업을 몇 개 유치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 지역에서 어떤 경제활동이 지속적으로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첨단산업’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니다.
첨단산업이라고 모두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는 데이터센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건설 과정에서는 막대한 투자가 들어가고 지역의 상징적인 첨단시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완공 이후 실제 상시 고용 인원이 많지 않다면 지역경제 전체를 떠받치는 일자리 기반이 되기는 어렵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화려해 보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협력업체와 기술자, 운영인력과 서비스업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라면 지역경제에는 훨씬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지역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의 크기나 투자금액만이 아니다.
그 산업이 주변의 사람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이다.
AI 시대에는 오히려 이 질문이 더욱 중요해진다.
AI가 잘하는 것은 정보의 처리다.
문서를 읽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능력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반대로 물리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은 여전히 사람과 장소를 필요로 한다.
기계를 설치하고 고치는 일, 로봇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일, 첨단 제조설비를 관리하는 일, 물류시설을 운영하는 일, 환자를 돌보고 노인을 보살피는 일, 건물과 도로와 철도를 관리하는 일, 새로운 장비를 시험하고 인증하는 일은 화면 속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영역에도 자동화는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와 직접 연결된 산업은 적어도 사무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 업무보다 장소와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지역이 눈여겨봐야 할 영역이 바로 여기에 있을 수 있다.
지역의 미래가 반드시 거대한 공장을 다시 세우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제조업 주변에는 설계와 시험, 인증, 정비, 교육, 물류, 자동화, 로봇 운영, 산업 소프트웨어 같은 수많은 기능이 존재한다.
AI와 로봇이 확산될수록 이런 기능은 오히려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기계를 만드는 것뿐 아니라 기계를 현장에 적용하고 유지하고 개선하는 산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곡과 같은 곳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서울과 멀지 않으면서도 경기 서북부와 인천, 파주와 김포를 연결할 수 있고, 여러 철도 노선이 만난다.
이런 곳의 경쟁력은 서울을 복제하는 데 있지 않을 수 있다.
여의도나 강남처럼 거대한 오피스 지구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주변 산업지역 사이를 연결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산·기술·서비스 거점이 되는 것이다.
기업의 본사는 서울에 있어도 시험과 교육시설은 대곡에 있을 수 있다.
AI 기업이 서울에 있어도 그 기술을 제조현장에 적용하는 회사들은 다른 지역에 있을 수 있다.
로봇을 개발하는 회사와 로봇을 유지하는 회사는 반드시 같은 곳에 있을 필요도 없다.
이런 산업 연결망 속에서 지역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지방경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그동안 지역발전 정책은 좋은 일자리를 지역에 가져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좋은 일자리’의 의미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연봉이 높고 학력이 높은 화이트칼라 일자리만을 좋은 일자리라고 정의한다면 AI 시대에는 지역이 더욱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지역경제에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필요하고, 주변 산업과 소비를 함께 만들어내며, 다른 지역으로 쉽게 이동하기 어려운 일자리가 중요하다.
의료와 돌봄도 그렇다.
산업설비 유지관리도 그렇다.
첨단 제조와 로봇 운영도 그렇다.
물류와 에너지, 도시 인프라 관리도 그렇다.
이런 산업들은 그 지역에서 실제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든다.
결국 지역경제의 생존은 단순히 GDP를 얼마나 만드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 경제가 지역에서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의 문제다.
기업의 매출이 커도 직원이 몇 명 없다면 그 기업은 국가경제에는 중요할 수 있지만 도시 하나를 떠받치기는 어렵다.
반대로 수많은 기업과 노동자, 협력업체와 서비스업이 얽혀 있다면 그 산업은 도시를 유지한다.
산업화 시대에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공장이 사람을 불렀다.
사람이 가족을 불렀다.
가족이 상권과 학교와 병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생산과 고용의 연결고리가 약해질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해도 고용은 늘지 않을 수 있고, 기업가치가 커져도 지역에는 사람이 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지역정책은 성장률만큼이나 ‘사람 필요도’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산업이 얼마를 투자하는지뿐 아니라 몇 명의 사람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많은 협력업체를 만들어내는지, 지역 안에서 얼마나 많은 소비와 서비스를 발생시키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대곡 주민들의 요구는 그래서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로 보기 어렵다.
그들은 주택이 아니라 도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잠을 자는 곳이 아니라 일하고 소비하고 생활하는 곳을 원한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그것조차 쉽지 않은 요구가 되어가고 있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업무시설을 짓는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채워지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조차 사람을 덜 필요로 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면 서울 밖의 도시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인가.
어떤 산업을 가져와야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살아가고, 가족을 이루고, 소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대곡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 외곽의 신도시도 마찬가지이고 지방의 산업도시도 마찬가지다.
인구가 줄어드는 한국에서 모든 도시가 지금의 규모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국 살아남는 도시는 사람들이 단순히 살고 싶어 하는 도시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실제로 필요로 하는 도시일 가능성이 크다.
서울은 앞으로도 자본과 정보와 문화가 집중되는 도시로 남을 수 있다.
심지어 사람을 덜 필요로 하면서도 더 부유한 도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을 선망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경제에는 선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실제로 사람을 필요로 해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고, 산업이 필요로 하고, 병원이 필요로 하고, 공장이 필요로 하고, 도시 자체가 사람의 노동과 기술을 필요로 해야 한다.
산업화 시대의 지역은 그런 필요를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었다.
AI 시대에는 그 필요를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대곡역 앞에서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일자리 몇 천 개가 아니다.
자신들이 사는 곳이 앞으로도 사람을 필요로 하는 도시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울이 사람을 덜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온다면, 지역경제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의외로 단순한 곳에 있을 수 있다.
사람이 필요한 경제.
앞으로 지역의 생존을 결정할 질문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