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을 쓰는 현대판 동인도회사와 WAR의 법칙
중국은 이미 패권국이다. 타자와 투수의 war측정방법이 같을 이유가 없듯, 미국과 중국의 패권이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다. 다만 누가 더 영향력있는가? 미국은 이미 이이제이판에 들어와있다. 이란과 석유거래를 하는 것만으로 달러패권이라는 역린을 건드렸지만, 미국은 대놓고 그걸 명분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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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나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기묘한 위계 관계가 있다. 계급이나 직함은 분명 상대가 위인데, 정작 현장의 실세는 따로 있는 경우다. "반장님, 이건 이렇게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라며 정중한 존댓말과 격식을 갖추어 말하지만, 정작 과업의 핵심 자원이나 실무적 지식을 쥐고 있는 쪽은 후임이나 실제 담당자다. 표면적인 예의와 상관없이 상대가 나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완성된 순간, 실질적인 지배력의 주인은 이미 바뀌어 있다.
야구에서 타자와 투수의 WAR(승리기여도)을 같은 기준으로 측정하지 않는 것처럼,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패권의 형태가 단 하나의 공식일 필요는 없다. 오랫동안 세계는 미국처럼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판을 깔고, 규범을 강제하며, 달러라는 전지전능한 통화로 지배하는 '홈런타자형 패권'만을 정답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팀의 승률을 올리는 '투수형 패권'의 방정식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 마오쩌둥은 미국이 전 세계에 미군 기지를 세우는 것을 두고 "스스로 자신의 목에 밧줄(noose)을 걸었다"고 일갈한 바 있다. 전 세계에 전선을 넓힐수록 유지 비용과 비대칭적 방어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자멸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오늘날 섬뜩한 현실이 되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라는 정복을 입고 중동과 유럽의 분쟁이라는 늪에 빠져 막대한 재정과 고가의 요격미사일을 소진하는 동안, 중국은 그 밧줄 바깥에서 전혀 다른 거대 망을 쳤다. 전 세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대신, 플라스틱 기초 원료부터 희토류, 배터리, 미사일 핵심 부품까지 전 세계 자원과 공급망을 독점하는 '21세기형 만물상', 즉 현대판 동인도회사가 된 것이다. 정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라 물건을 쥔 상인의 모습을 한 채, 상대가 자국의 공급망에 중독되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전략이다.
이 새로운 비대칭적 패권의 서늘함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거래하며 미국의 달러 패권을 흔들면서도 결코 미국과 직접적인 정면충돌 명분을 주지 않는다. 대신 세계 최대의 석탄화학 설비로 석유 수입을 확 줄여버리거나 막대한 비축유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군사력 한 번 쓰지 않고 글로벌 유가의 방향성을 좌지우지한다. 미국이 전면전의 리스크와 경제적 압박의 한계 사이에서 외통수에 걸려 머뭇거리는 사이, 중국은 글로벌 만물상의 최대 구매자이자 공급자라는 실질적 지위를 활용해 판의 바깥에서 묵묵히 실리를 챙긴다.
심지어 오랜 우방이라 불리는 러시아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러한 '존댓말을 쓰는 실세'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공식 석상에서는 대등한 동맹이라 칭송하지만, 전쟁으로 사정이 급해진 러시아의 목줄을 죄는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이다. 서방의 제재를 의식해 완제품 무기는 단호히 거절하고 공작기계와 부품만 흘려보내며 '겨우 버틸 만큼만' 도와준다. 파이프라인 가스 가격 협상에서는 러시아 자국 내 보조금 수준인 터무니없는 가격을 던져놓고 협상장을 나가버린다. 겉으로는 예의 바른 파트너의 표정을 하고 있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목을 매는 순간 단 한 줄의 공급 조건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냉혹함이다.
결국 현대 국제정치에서의 패권은 누가 더 높은 단상에 올라앉아 지시를 내리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상대가 나를 대체할 수 없도록 만들었는가,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미국이 전 세계에 깔아둔 군사기지라는 무거운 밧줄에 발목이 잡힌 채 전통적 스탯을 쌓으려 고군분투하는 사이, 중국은 세계 경제가 자국의 만물상에 의존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두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패권 지수를 올려가고 있다. 표면적인 언행은 얌전하고 격식 있어 보일지 몰라도, 상대를 실질적인 외통수로 몰아넣는 이 비대칭적 지배력이야말로 중국이 이미 우리 곁에 구축한 '또 다른 형태의 패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