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상대할 협상 상대가 이란에서 동맹 전체로 늘었다
볼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 연임 표결에서 미국이 144대 10으로 고립되고, 이를 비판한 프랑스와 공개 충돌한 사건은 서방동맹의 붕괴라기보다 미국 중심 질서의 운영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군사력과 달러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동맹국들이 미국의 판단을 자동으로 따르지 않으면서 미국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설득과 압박 비용을 부담하게 됐다. 프랑스는 미국 진영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동맹 내부의 일방적 위계를 거부하고 있으며, 미국이 이스라엘의 안보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유럽과의 간극은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란은 미국의 인권 비판에 맞설 정치적 명분을 얻고, 중국은 미국과 유럽의 균열을 활용할 기회를 확보했다. 결국 이번 충돌은 미국의 힘이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 미국이 이란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럽까지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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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인권최고대표 연임 표결서 미국 144대 10으로 고립
이스라엘과는 한목소리, 프랑스와는 공개 충돌
이란은 ‘도덕적 정당성’ 얻고 중국은 서방 균열의 반사이익
미국의 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질서 유지 비용이 높아진 것
미국과 프랑스가 유엔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발단은 볼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의 연임 문제였다. 유엔 총회는 7월 24일 튀르크 대표의 임기를 2030년 10월까지 4년 연장하는 안을 찬성 144표, 반대 10표, 기권 13표로 가결했다. 미국은 러시아와 이스라엘 등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지만, 유럽연합과 아프리카·중남미 다수 국가, 중국은 연임을 지지했다. ([Reuters][1])
프랑스는 표결 직후 미국을 향해 “미국은 과거 인권의 등불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며 “세계는 더 이상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즉각 반발했다. 7월 27일 우크라이나 전쟁을 논의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발언하자 미국 대표단이 회의장을 잠시 떠났다. 미국 측은 프랑스의 발언을 “정치화된 허튼소리”이자 “위선적인 과시”라고 규정하고, 프랑스가 표현을 철회할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Reuters][2])
겉으로는 인권을 둘러싼 논쟁이다. 그러나 각국이 실제로 추구하는 목표를 놓고 보면, 이번 충돌은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질서의 운영 방식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잃은 것은 힘보다 ‘자동 동의’다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상대 국가를 무조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관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두는 것이다.
이란 문제에서도 미국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비교적 분명하다. 이란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되고, 호르무즈해협은 열려 있어야 하며, 이란산 원유와 자금의 흐름은 미국이 감시할 수 있는 금융·결제망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대이란 제재를 유지하려면 유럽 금융기관이 협조해야 하고, 원유 거래를 제한하려면 해운·보험망이 움직여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수출통제 역시 동맹국들이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효과가 생긴다. 유엔과 국제기구에서 미국의 행동을 정당화해 줄 정치적 연합도 필요하다.
미국 패권은 달러와 군사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동맹국이 미국의 판단을 일정 부분 신뢰하고, 미국이 만든 규칙을 자발적으로 집행해 주기 때문에 유지된다.
이번 144대 10 표결은 미국의 군사력이나 달러의 힘이 약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미국이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들이 자동으로 따라오던 구조가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다시 말해 미국이 잃고 있는 것은 명령할 능력이 아니라, 명령하지 않아도 동맹국이 움직여 주던 환경이다.
이스라엘과 가까워질수록 미국의 연합은 좁아진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튀르크 대표의 연임에 함께 반대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원하는 최종 상태는 완전히 같지 않다.
미국은 이란을 관리 가능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다. 핵 개발을 제한하고 호르무즈해협을 안정시키며, 원유와 자금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이란 체제 자체가 존속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시설뿐 아니라 탄도미사일, 드론, 헤즈볼라와 후티를 포함한 대리세력까지 실질적으로 약화하기를 원한다. 가능하다면 이란 혁명체제 자체의 약화나 교체도 선호할 수 있다.
튀르크 대표는 가자지구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연임 반대에서 같은 편에 선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미국이 이스라엘의 입장에 가까워질수록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중동정책을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안보목표를 지원하는 정책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진다. ([Reuters][1])
이번 표결에서 미국과 러시아, 북한, 이스라엘이 같은 방향에 섰다고 해서 이들이 하나의 전략적 진영이 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튀르크 대표가 서방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비판했고, 미국은 오히려 그가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민주국가에는 엄격하면서 권위주의 국가에는 관대하다고 주장했다. 같은 반대표라도 반대 이유는 서로 정반대였다. ([UN Transcripts][3])
그러나 외교에서는 이유보다 화면에 나타난 표결 결과가 더 강한 정치적 상징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는 바로 이 장면을 이용해 미국이 인권 문제에서 고립됐다고 공격했다.
프랑스는 미국 진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진영 안의 위계를 거부한다
프랑스의 행동을 곧바로 서방동맹 이탈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
프랑스는 미국과의 군사·정보·경제협력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정부도 이번 표결 차이가 양국 간 협력관계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Reuters][4])
프랑스가 거부하는 것은 동맹 자체라기보다 미국이 동맹 내부에서 갖고 있던 일방적인 해석권이다.
과거에는 미국이 자유와 인권, 국제질서의 의미를 정의하면 유럽이 일부 이견을 제기하면서도 대체로 그 틀 안에서 움직였다. 이제 프랑스는 미국 역시 인권과 국제법의 심판 대상이며, 미국이 더 이상 혼자서 서방의 도덕적 기준을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친중 또는 친이란 노선과는 다르다.
프랑스의 목표는 미국 질서를 중국 질서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 질서 안에서 유럽의 독립적인 판단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나토와 미국의 군사력은 계속 필요하지만, 미국의 국내정치와 이스라엘의 안보목표에 유럽 외교가 자동으로 종속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서방동맹 붕괴’보다 ‘동맹 내부의 지분 재협상’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다만 미국이 프랑스의 차기 주미대사 후보에 대한 동의를 지연하거나 거부하는 방안까지 검토하면서 갈등은 단순한 언쟁을 넘어섰다. 아직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동맹국의 공개 비판에 미국이 외교적 비용을 부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Reuters][4])
이란이 얻은 것은 돈이 아니라 명분이다
이번 충돌에서 직접적인 반사이익을 얻은 국가는 이란이다.
이란은 유엔 총회에서 미국이 자국의 인권 상황을 거론하자 “미국은 이란 국민을 심판할 도덕적 권위나 법적 신뢰성이 없다”며 미국이 인권을 독립국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UN Transcripts][3])
이는 이란 체제의 기존 논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란은 국내적으로 미국의 압박을 ‘외세에 맞서는 저항’으로 설명한다. 미국이 프랑스와 인권 문제로 충돌하고 유엔 총회에서 소수에 머무르면, 이란 정권은 미국의 제재와 군사행동 역시 보편적 국제규범이 아니라 미국의 선택적 권력행사라고 주장하기 쉬워진다.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이 같은 입장에 서고 프랑스가 미국의 도덕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공격한 장면은 이란이 내부 결집과 대외 선전에 활용하기 좋은 소재다.
하지만 이란의 실질적 이익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번 표결로 동결자산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원유 제재가 해제되는 것도 아니다. 이란의 미사일이나 핵시설이 더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군사력과 금융제재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란이 얻은 것은 경제적 산소가 아니라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이다. 다만 협상에서는 명분도 자산이다. 미국이 이란에 추가 조건을 요구할수록 이란은 “미국조차 동맹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며 버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중국은 싸우지 않고 균열의 이익을 얻는다
중국은 튀르크 대표의 연임에 찬성했다. 미국이 반대하고 프랑스와 유럽이 찬성한 이번 구도에서 중국은 미국과 직접 충돌하지 않고도 다자주의를 지지하는 국가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Reuters][1])
중국의 장기 목표는 미국 중심의 단극질서를 약화하고, 달러와 미국 동맹망에 의존하지 않는 거래·외교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이 반드시 미국을 모든 분야에서 이길 필요는 없다. 미국이 중동과 유럽에서 더 많은 군사·외교 비용을 부담하고, 미국과 동맹국 사이의 신뢰가 낮아지는 것만으로도 중국에는 유리하다.
미국이 이란 전쟁과 나토 문제로 유럽과 충돌하는 가운데 인권 문제에서까지 프랑스와 공개적으로 싸우면, 중국은 서방이 주장해 온 ‘가치동맹’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이 새로운 인권의 등불이 된 것은 아니다. 튀르크 대표와 유엔 인권기구는 중국의 인권 문제도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중국의 이익은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데서 나오기보다 미국과 유럽이 서로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중국이 가장 원하는 상태는 미국과 유럽이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동맹은 유지하면서도 중요한 사안마다 협상과 설득에 더 많은 비용을 쓰는 상태다.
이번 미·프 충돌은 바로 그런 상태에 가깝다.
달러패권의 균열이 아니라 패권 유지 비용의 상승
이번 사건을 달러패권의 직접적인 붕괴 신호로 연결하는 것은 성급하다.
국제결제와 원유거래, 금융제재에서 달러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프랑스 역시 달러 금융망이나 나토를 이탈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달러 중심 질서는 통화 자체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미국의 제재를 집행하는 유럽 은행, 미국의 수출통제에 참여하는 동맹국, 해상질서를 공동으로 유지하는 나토 국가, 미국의 군사행동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국제연합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동맹국이 미국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으면 미국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관세와 제재, 외교적 압력, 군사비용을 사용해야 한다.
미국은 여전히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다. 그러나 압박할 일이 많아질수록 패권은 비싸진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미국의 힘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힘과 미국이 주장하는 명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프랑스의 “세계가 더 이상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표현은 과장이다. 미국의 금리와 제재, 군사행동, 관세정책에 세계는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세계는 여전히 미국의 말을 듣는다. 다만 미국이 말한 대로 움직일 것인지는 각자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까지만 해도 미국과 이스라엘, 이란, 중국의 셈법은 주로 이란의 핵과 원유, 호르무즈해협, 달러망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다.
미국이 이란을 관리 가능한 질서 안으로 되돌리려면 이란만 상대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더 강한 요구를 통제하고, 프랑스와 유럽을 설득하며, 중국이 서방의 균열을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미국이 상대해야 할 협상 상대가 이란 하나에서 동맹국 전체로 늘어난 것이다.
이번 유엔 충돌은 서방동맹의 종말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더 이상 동맹을 전제로 전략을 세울 수 없고, 사안별로 동맹의 동의를 다시 구매하고 설득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