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라는 보험, 그리고 비싸지는 보험료
달러 패권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를 영구적인 권리로 착각하고 내부 생산 기반을 방치한 대가가 눈앞의 청구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미국이 진정한 강대국으로 남기 위해서는 달러라는 보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패권의 안락함을 일부 내려놓고 내부 산업과 실물 경제의 체력을 복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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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패권은 법에 적힌 권리가 아니다. 국제법이 미국에게 “세계의 기축통화를 발행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들이 영원히 달러를 써야 한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다. 달러 패권은 오로지 미국이 쌓아온 실력, 군사력, 금융시장, 신뢰, 해상질서, 동맹망, 석유 결제 관행이 맞물려 만들어낸 힘이다. 그래서 달러 패권은 명분이 될 수 없다. 미국이 어떤 전쟁이나 제재를 설명할 때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신 그것은 늘 다른 이름으로 번역된다. 항행의 자유, 핵확산 방지, 동맹 방어, 국제질서 수호, 에너지 안보 같은 말들이다.
그런데 본질로 들어가면 달러 패권은 미국에게 하나의 거대한 보험이었다. 평범한 부국이 되는 데 꼭 기축통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본, 독일, 프랑스는 달러 패권 없이도 오랫동안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문제는 미국이 단순한 부국이 아니라 전 세계에 군사기지를 두고, 항모전단을 운용하고, 동맹국의 안보를 설계하고, 금융제재로 적국의 숨통을 조이는 초강대국이라는 점이다. 이런 국가는 위기가 올 때마다 거대한 완충장치가 필요하다. 달러가 바로 그 보험이었다.
보험의 효능은 위기 때 드러난다. 미국은 전쟁을 치르고, 재정적자가 커지고, 금융위기가 와도 자국 통화로 빚을 낼 수 있다. 세계는 여전히 달러를 필요로 하고, 미국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본다. 다른 나라라면 외환이 말라 긴축과 수입 축소와 통화위기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미국은 달러를 발행하고 국채를 팔아 시간을 번다. 달러 패권은 미국을 즉각적인 외환위기에서 보호해주는 장치였다. 큰 위기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보험이었다.
하지만 보험은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방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국은 후자에 가까웠다. 세계가 달러를 원한다는 사실은 미국에게 위험한 안락함을 주었다. 무역적자가 커져도 달러가 돌아온다. 재정적자가 커져도 국채가 팔린다. 공장을 해외로 보내도 값싼 소비재가 들어온다. 금융시장이 커지고 자산가격이 오르면 겉보기 번영은 유지된다. 그렇게 미국은 “생산하는 나라”에서 “소비하고 금융화하는 나라”로 조금씩 이동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트리핀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세계가 달러를 보유하려면 미국은 달러를 세계에 공급해야 한다. 달러를 공급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역적자를 내는 것이다. 미국이 물건을 사 오고 달러를 내보내면, 다른 나라는 그 달러를 보유하거나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 이 순환은 달러 패권을 유지시켰지만, 동시에 미국 내부의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켰다.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보험료를 냈는데, 그 보험료가 바로 내부 산업의 황폐화였던 셈이다.
달러가 세계의 안전자산이 되면 달러 가치는 미국의 실물경제 체력보다 높게 평가되기 쉽다. 강한 달러는 미국 소비자에게는 축복이었다. 수입품이 싸졌고, 해외에서 만든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조업에는 독이었다. 달러가 비싸면 미국에서 만든 제품은 비싸지고, 해외에서 만든 제품은 싸진다. 기업은 당연히 생산비가 낮은 곳으로 공장을 옮긴다. 중국은 값싼 노동력과 거대한 생산능력, 달러를 받아줄 의지를 갖춘 최적의 외주처였다.
미국 엘리트들은 이를 효율이라고 불렀다. 싸게 만들어 싸게 소비하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 이익은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금융자본과 대기업, 빅테크, 글로벌 공급망을 설계한 계층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반면 러스트벨트의 제조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자동차, 철강, 기계, 부품 산업이 떠난 자리에는 낮은 임금의 서비스직, 약해진 지역사회, 분노한 중산층이 남았다. 미국은 세계 최고 가치의 통화를 쥐고 있었지만, 그 통화로 지켜야 할 내부 생산 기반을 조금씩 잃어갔다.
이것이 달러 보험의 모럴해저드였다. 보험이 있으니 위험한 운전을 반복한 것이다. 달러가 강하고, 국채가 팔리고, 수입품이 싸고, 금융시장이 커지자 미국은 산업공동화의 비용을 늦게 느꼈다. 하지만 보험은 손실을 없애주는 장치가 아니다. 손실을 늦게 보이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늦게 보이는 손실은 더 깊게 쌓인다.
지금 미국이 겪는 딜레마는 여기서 나온다. 뒤늦게 미국은 공장을 다시 가져오려 한다. 리쇼어링, IRA, 반도체 공급망 재편, 중국 견제는 모두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그러나 수십 년간 비워둔 공장을 다시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숙련공은 사라졌고, 지역 산업 생태계는 무너졌고, 생산비는 높아졌다. 제조업을 살리려면 어느 정도 약한 달러와 긴 시간, 내부 투자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달러가 약해지면 패권의 신용이 흔들릴 수 있다. 달러 패권을 유지하자니 제조업이 약해지고, 제조업을 살리자니 달러 패권의 일부 안락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국-이란전은 이 구조를 더 날카롭게 보여준다. 미국은 겉으로는 핵확산 방지, 항행의 자유, 호르무즈 안정, 동맹 방어를 말한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달러 질서와 에너지 결제, 해상통제, 제재권의 문제가 깔려 있다. 이란이 중국에 원유를 팔고, 위안화나 우회결제망을 통해 버틸 수 있다면 미국의 제재는 예전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달러 보험의 독점성이 약해지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방치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게 막으면 또 다른 비용이 발생한다.
이란을 압박하면 이란이 굴복해서 달러 질서 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국면은 더 복잡하게 흘러갔다. 이란은 호르무즈를 쥐고 버텼고, 후티는 홍해와 밥엘만데브를 흔들었고, 사우디와 홍해 전선이 붙었고, 카스피해와 러시아, 북한 변수까지 이어졌다. 미국은 이란을 협상장으로 끌고 오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도 여러 전선의 관리비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여기서 달러 보험의 보험료가 보이기 시작한다. 공습에는 예산이 든다. 해상질서 유지에는 함대와 미사일이 든다. 미사일 방어에는 패트리엇, 사드, SM 계열 요격탄이 소모된다. 유가가 오르면 미국 국민은 주유소에서 비용을 느끼고, 국채금리가 오르면 미국 정부는 더 비싼 이자를 내야 한다. 동맹국들은 “미국의 질서가 안정이 아니라 비용 전가가 아닌가”라고 묻기 시작한다. 달러 질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 달러 질서의 유지비를 더 올리는 역설이 생긴다.
더구나 달러 패권은 명분으로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은 늘 다른 말을 해야 한다. 항행의 자유를 말하면서 호르무즈 통행료를 거론하면 명분은 흐려진다. 국제질서를 말하면서 특정 해협의 관리권을 사실상 주장하면 다른 나라들은 의심한다. 핵확산 방지를 말하면서 정작 전쟁이 이란의 핵무장 필요성을 강화한다면 전략적 산출은 더 나빠진다. 보험을 지키려는 행동이 보험의 신뢰를 깎는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 석유를 팔아 버틸 수는 있어도 재건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내부 경제난과 국민 불만도 크다. 그러나 이란이 원하는 최소 목표가 “핵과 미사일의 본질적 양보 없이 전쟁을 해상안보 협상으로 바꾸는 것”이라면, 미국은 곤란해진다. 미국은 핵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시장은 유가를 보고, 동맹국은 해운비를 보고, 유권자는 휘발유 가격을 본다. 결국 협상장은 핵에서 호르무즈로, 비확산에서 통항 안정으로 이동한다. 미국이 더 때릴 명분은 얻지만, 때릴수록 수지는 나빠진다.
달러 보험은 여전히 강력하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달러를 버리지 않는다. 미국 국채시장은 여전히 깊고, 달러 결제망은 여전히 편리하며, 위기 때 달러로 도망가려는 본능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보험이 강하다는 사실과 보험료가 감당 가능하다는 말은 다르다. 지금 미국은 보험이 있기 때문에 버티지만, 그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군사비, 더 높은 금리, 더 큰 재정 부담, 더 깊은 산업 재건 비용, 더 많은 외교적 불신을 치르고 있다.
미국의 근본 문제는 달러 패권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을 영구적 권리처럼 사용했다는 데 있다. 보험은 위기 때 써야 하는 장치다. 하지만 보험이 있다고 집을 방치하고, 생산기반을 팔아넘기고, 위험한 운전을 반복하면 언젠가 보험료가 오른다. 더 나쁜 경우에는 보험사가 아니라 가입자 자신이 망가진다.
지금 미국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달러 패권을 끝까지 왕관처럼 지키려 할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관리해야 할 보험으로 낮추어 볼 것인가. 전자는 더 많은 압박과 더 많은 군사개입, 더 많은 제재와 더 많은 비용을 부른다. 후자는 패권의 안락함 일부를 내려놓고 내부 산업, 재정 절제, 동맹 신뢰, 실물 생산능력을 복구하는 길이다.
달러 패권은 미국을 큰 위기에서 보호해온 보험이었다. 그러나 그 보험에 너무 오래 기대면서 미국은 산업공동화라는 모럴해저드에 빠졌고, 이제 보험료는 유가, 금리, 전쟁비용, 무기 재고, 동맹 불신의 형태로 청구되고 있다. 미국-이란전은 그 청구서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사건이다. 달러는 아직 강하다. 하지만 강한 달러가 언제나 강한 미국을 뜻하지는 않는다. 진짜 강한 국가는 보험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험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집안의 체력을 갖춘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