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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세계를 불편하게 만들면 미국은 다시 혁신할까",
  "slug": "trump-reverse-creative-destruction",
  "summary": "트럼프의 경제정책은 세계화가 제공했던 값싼 노동력, 해외생산, 긴 공급망이라는 ‘싼 탈출구’를 관세와 규제로 막아 기존의 최적해를 인위적으로 깨뜨리고, 그 압력 속에서 기업이 자동화·AI·공정혁신을 통해 새로운 생산성을 만들어내도록 강제하는 실험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뒤 기존 산업이 파괴되는 슘페터의 전통적 ‘창조적 파괴’와는 순서가 반대로, 먼저 파괴와 불편을 만들고 그 뒤에 창조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역방향의 창조적 파괴’라 할 만하다. 흥부가 다친 제비를 치료한 뒤 박씨를 얻은 것과 달리 놀부는 박씨를 얻기 위해 먼저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듯, 트럼프의 정책도 파괴 자체가 혁신을 낳는다는 잘못된 인과관계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평가 기준은 관세나 리쇼어링의 규모가 아니라, 세계화 후퇴로 260짜리 세계가 300짜리 세계가 된 뒤 그 비용을 다시 260 이하로 낮출 새로운 생산성과 산업생태계가 실제로 만들어지느냐에 있다. 창조가 뒤따르면 성장통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것은 창조적 파괴가 아니라 단순한 파괴뿐이다.",
  "body": "# 트럼프의 불편한 경제학: 제비 다리를 먼저 부러뜨리는 창조적 파괴인가\r\n\r\n경제에 나쁜 환경은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낳을까. 직관적으로는 그렇다.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임금이 오르면 기업의 비용은 늘어난다. 에너지가 비싸지면 생산비가 상승하고, 관세가 올라가 값싼 해외생산이 어려워지면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가격도 높아진다. 그러나 경제의 역사를 조금 길게 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동력 부족과 임금 상승이 자동화를 촉진한 경우가 있었고, 높은 에너지 가격은 에너지 절약 기술과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한 투자를 자극했다. 기업과 사회는 편안한 환경에서는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우회하지만,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 들기도 한다. 악조건이 혁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혁신을 강제하는 압력이 된다.\r\n\r\n여기에서 요제프 슘페터가 떠오른다. 슘페터를 이야기할 때 가장 유명한 말은 ‘창조적 파괴’다. 자본주의는 기존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발전하는 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상품과 기술, 기업과 생산방식이 끊임없이 기존의 것을 밀어내면서 발전한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마차산업이 쇠퇴하고 새로운 통신기술이 기존 통신산업을 무너뜨린다. 슘페터는 경제구조를 내부에서 끊임없이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며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 과정을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사실로 보았다.\r\n\r\n그런데 슘페터에게는 창조적 파괴 못지않게 흥미로운 또 하나의 역설이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실패해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성공 자체가 그것을 보호하던 사회적 제도와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성공한 자본주의는 거대한 기업조직과 관료화를 낳고, 풍요와 교육을 확대하며, 자본주의를 당연하게 지지하던 사회구조까지 바꾼다. 그의 유명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이었다. 자본주의는 실패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성공 때문에 자신이 살아갈 조건을 허물 수 있다는 것이다.\r\n\r\n슘페터의 논리를 그대로 오늘날 세계화에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역설은 세계화의 역사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세계화 역시 실패해서 흔들리는 것만은 아니다. 세계화는 대단히 성공했다. 기술과 자본을 가진 나라, 값싼 노동력과 생산기지를 가진 나라, 석유와 광물을 가진 나라, 거대한 소비시장을 가진 나라들이 하나의 거대한 국제분업 체계 안으로 들어왔다. 가난했던 나라들은 산업화됐고, 생산기지였던 나라들은 기술을 배웠다. 자본이 축적됐고 내수시장이 커졌다. 선진국 소비자는 값싼 상품을 얻었고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곳을 찾아 생산비를 낮췄다. 전체 파이는 빠르게 커졌다.\r\n\r\n그런데 바로 그 성공이 새로운 질문을 만들었다. 자원국은 왜 자신들이 계속 원료만 팔아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생산기지였던 나라는 왜 자신들이 영원히 다른 나라 기업의 제품을 조립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소비시장을 가진 나라는 왜 자기 국민에게 상품을 팔면서 생산과 부가가치는 다른 나라에 남겨야 하는지 묻는다. 선진국 노동자도 값싼 상품을 얻는 대신 왜 자신의 제조업과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지 따지기 시작했다. 지난 글에서 나는 이것을 ‘자각’이라고 표현했다. 세계화가 사람들을 성장시켰고,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는 어제보다 잘살고 있는가”가 중요했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고 나면 질문은 “그런데 왜 나는 이 몫밖에 받지 못하는가”로 바뀐다. 한번 시작된 자각은 좀처럼 되돌릴 수 없다.\r\n\r\n바로 여기에서 트럼프가 등장한다. 트럼프가 슘페터의 이론을 현실에서 실험하기 위해 이런 정책을 펼친다고 볼 근거는 없다. 세계경제의 거대한 장기순환을 계산해 의도적으로 수축을 설계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만들어내는 구조를 놓고 보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트럼프는 세계화가 기업들에게 제공했던 ‘싼 탈출구’를 일부러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화는 기업이 어려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수많은 우회로를 제공했다. 국내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면 사람을 덜 쓰는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 더 싼 노동력이 있는 나라로 갈 수 있었다. 국내 생산성이 낮으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대신 공장을 해외로 이전할 수 있었다. 공급망이 한 지역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어도 평상시에는 가장 싼 곳에서 계속 생산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세계 어딘가에서 더 싼 답을 찾을 수 있었다.\r\n\r\n트럼프의 정책은 이 계산식 자체를 흔든다. 해외에서 100에 만들 수 있고 미국에서 130에 만들 수 있다면 기업은 해외에서 생산한다. 그런데 해외 생산에 관세와 규제, 지정학적 위험과 시장 접근의 불확실성을 붙여 비용을 140으로 만들어버리면 어제까지 비효율적이었던 미국 생산 130이 갑자기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다. 2026년 미국의 알루미늄 정책은 미국 내 제련시설을 건설·확장하는 온쇼어링 계획을 승인받은 기업에 더 낮은 관세율을 적용하도록 했고, 특허의약품에도 높은 기본 관세를 두면서 미국 내 생산계획이나 온쇼어링 협약을 맺은 기업에는 크게 낮은 세율 또는 무관세 혜택을 연결했다. 즉 관세를 단순히 국경 장벽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생산 위치를 바꾸는 유인으로 사용하고 있다.\r\n\r\n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데 130이 든다고 기업이 영원히 130을 받아들일까. 경쟁이 살아 있다면 120으로 낮추려 할 것이고, 다시 110을 찾을 것이다. 로봇을 도입하고 AI를 활용하며 생산공정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 사람을 덜 쓰는 방법을 찾고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며 에너지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여기까지 성공한다면 처음의 비용 상승은 단순한 보호장벽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존의 최적해를 깨뜨려 새로운 최적해를 찾도록 만든 압력이 된다. 세계화가 “더 싼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답을 제공했다면, 그 답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기업은 비로소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덜 필요로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수도 있다.\r\n\r\n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흥부와 놀부가 떠오른다. 흥부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발견하고 치료해줬고, 그 결과 제비가 가져온 박씨에서 복을 얻었다. 그것을 본 놀부는 결과를 재현하고 싶었다. 그런데 흥부가 한 일을 그대로 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제비의 다리를 먼저 부러뜨린다. 제비 다리가 부러진 뒤 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보고,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 복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창조적 파괴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경제정책도 놀부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슘페터가 말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 기술을 밀어내고, 더 생산적인 기업이 덜 생산적인 기업을 무너뜨리는 과정이었다. 자동차가 등장했기 때문에 마차가 사라지는 것이다. 마차를 먼저 없애버리면 자동차가 저절로 발명되는 것이 아니다.\r\n\r\n이 점에서 트럼프식 모델을 슘페터적으로 해석하면 순서가 뒤집혀 있다. 슘페터의 세계에서는 ‘창조 → 파괴’가 기본이다. 새로운 것이 우월하기 때문에 낡은 것이 밀려난다. 그러나 트럼프의 실험을 우리가 지금까지의 논리대로 해석하면 ‘파괴 → 압박 → 적응 → 창조?’가 된다. 먼저 해외생산의 비용을 높이고 기존 공급망을 흔들며 기업이 이용하던 탈출구를 막는다. 그 뒤에 살아남기 위해 로봇과 AI, 자동화와 새로운 제조방식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한다. 말하자면 역방향의 창조적 파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물음표가 붙어야 한다.\r\n\r\n왜냐하면 제비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반드시 박씨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동화 대신 가격을 올릴 수 있다.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정부의 보조금과 보호장벽에 의존할 수도 있다. 경쟁에서 보호받은 기업이 오히려 혁신의 필요성을 잃을 수도 있다. 불확실성이 지나치게 커지면 기업은 과감하게 투자하는 대신 현금을 쥐고 기다릴 수도 있다. 미국으로 돌아와야 할 공장이 미국이 아니라 관세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나라로 이동할 수도 있다. 파괴는 정책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창조는 명령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이것이 놀부의 제비와 창조적 파괴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r\n\r\n그러나 여기에서 경제의 사이클이라는 문제를 함께 생각하면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신용이 팽창하는 사회는 영원히 팽창할 수 없다. 부채가 늘고 자산가격이 오르며 낙관이 확산되다가 어느 순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용이 줄고 투자와 소비가 위축되고 한계기업이 퇴출되며 자산가격이 조정된다. 수축의 한가운데에서는 모든 것이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충분한 수축은 역설적으로 다음 팽창의 조건을 만들기도 한다. 과도한 부채가 정리되고 비싸던 자산이 싸지며 잘못 배분된 자본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다. 바닥은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이면서 동시에 다음 상승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r\n\r\n지난 수십 년의 세계화를 하나의 거대한 팽창과정으로 본다면 어떨까. 교역이 팽창했고 신용이 팽창했다. 공급망은 길어졌고 자본은 더 자유롭게 이동했다. 상품은 싸졌고 소비는 늘었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풍요 속에서 각국의 기대수준도 함께 높아졌다. 더 높은 임금을 원하고, 더 좋은 일자리를 원하고, 자원국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원하며, 국가는 더 높은 경제안보를 원한다. 기업은 여전히 낮은 비용을 원하고 소비자는 값싼 상품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있는 요구지만 모든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면 전체 비용이 높아진다. 지난 글에서 이를 260짜리 세계가 300짜리 세계로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효율적인 공장 하나 대신 두세 개의 공장이 필요하고, 재고를 더 쌓아야 하며, 가장 싼 공급처가 아니라 더 안전한 공급처를 이용해야 한다. 세계는 더 안전하고 더 공평해질 수 있지만 그만큼 더 비싸진다.\r\n\r\n이 장기적인 방향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미국 국채금리인지도 모른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1980년대 초 정점을 찍은 뒤 등락을 반복하면서도 약 40년 동안 거대한 하락 추세를 이어갔다. 세계화, 저물가, 풍부한 저축과 신용팽창의 시대에 돈의 가격은 장기적으로 계속 싸졌다. 그러나 2020년을 전후해 그 방향이 뚜렷하게 뒤집혔다. 최근의 상승은 트럼프가 시작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의 인플레이션과 통화긴축,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등 훨씬 큰 힘이 먼저 작동했다. 다만 트럼프는 관세와 공급망 재편, 국내투자 압박과 재정정책을 통해 이미 시작된 전환에 추가적인 충격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0년에 걸쳐 서서히 내려왔던 돈의 가격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빠르게 올라가는 모습마저, 묘하게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느린 팽창 뒤의 빠른 파괴’와 닮아 있다. 트럼프가 그 전환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속도를 늦추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r\n\r\n그렇다면 트럼프가 만들어내는 충격은 이 수축을 더욱 빠르게 만드는 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세계화 시대에 너무 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탈출구를 막고 기업과 국가가 피하고 있던 비용을 다시 앞으로 가져온다. 세계가 조금 더 가난해지고 여유가 줄어들면 질문도 달라진다. 풍요로운 시절에는 “왜 나는 이것밖에 받지 못하는가”라고 자신의 몫을 생각할 수 있다. 극단적인 압박 속에서는 “우리 기업이 살아남는가”, “내 일자리가 유지되는가”, “이 시장에 계속 물건을 팔 수 있는가”가 먼저가 된다. 자각의 질문이 생존의 질문으로 바뀐다. 이 의미에서 아주 과감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트럼프는 세계화가 만들어놓은 풍요와 편안함을 깨뜨리고, 너무 오래 지속된 팽창을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수축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r\n\r\n이 질문이 더 흥미로운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 때문이다. 미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창조적 파괴를 비교적 많이 허용해온 경제였다. 기업이 실패하고 산업이 사라져도 새로운 기업과 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파산은 끝이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도였고, 벤처자본은 수많은 실패를 감수하면서 소수의 거대한 성공을 찾았다. 미국의 강점은 모든 기존 산업을 보존하는 능력보다 자본과 인력이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하는 능력에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미국이 잘해왔던 이 과정을 국가 차원에서 훨씬 거칠게 재현하려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편안한 균형을 보호하는 대신 균형을 흔들고, 기업이 이용하던 값싼 탈출구를 막고, 먼저 비용을 올린 뒤 미국 기업이 그 비용을 다시 낮출 방법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r\n\r\n여기에서 슘페터의 또 다른 역설과 다시 만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너무 성공해서 자신을 지탱하는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트럼프는 마치 그 역설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너무 성공해서 편안해졌다면 그 편안함을 깨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너무 많은 우회로가 혁신을 늦췄다면 우회로를 닫으면 되는 것 아닌가. 너무 오랫동안 팽창했다면 한번 수축해야 다음 팽창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이것이 실제 트럼프의 머릿속에 있는 거대한 경제철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하나의 체계로 바라보면 이런 질문은 충분히 가능하다.\r\n\r\n결국 트럼프의 경제정책을 평가할 기준은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했느냐가 아니다. 관세를 얼마나 높였는지도 아니고, 공장을 몇 개 미국으로 옮겼는지만으로도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무엇이 만들어졌느냐다. 세계화의 후퇴로 260짜리 세계가 300짜리 세계가 됐다면, 이 실험이 성공했다고 부르기 위해서는 그 300을 다시 260 이하로 낮출 새로운 생산성이 등장해야 한다. 비싼 미국 노동력을 쓰면서도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자동화가 만들어지고, 미국에서 생산하면서도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제조방식이 등장하며, AI와 로봇이 실제 산업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보호가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을 기업과 산업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300을 260으로, 나아가 240과 220으로 낮출 수 있다면 오늘의 비효율은 다음 효율을 만들어낸 비용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n\r\n그렇지 않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관세와 보조금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는 공장만 남고, 소비자는 더 비싼 상품을 사고, 정부는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하며, 세계 전체의 생산성만 낮아진다면 창조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슘페터에게 파괴는 목적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뛰어넘으면서 발생하는 결과였다. 자동차를 만들었더니 마차가 사라진 것이지,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먼저 마차를 부순 것이 아니었다.\r\n\r\n그래서 지금 트럼프가 벌이는 경제실험을 흥부전의 한 장면에 비유한다면 아직 결말을 알 수 없는 놀부의 제비에 가깝다. 그는 먼저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있다. 어쩌면 그 충격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이전에는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과 생산방식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박씨는 정말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경제에는 동화의 약속이 없다.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박씨가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r\n\r\n트럼프의 파괴 뒤에 새로운 생산성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훗날 그것을 ‘역방향의 창조적 파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는다면 역사가 내릴 평가는 훨씬 단순하다. 그는 창조적 파괴를 한 것이 아니라, 박씨를 기다리며 제비 다리만 부러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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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_at": "2026-09-14T15:00:11.6624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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