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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신뢰가 사라진 자리, 불신의 보험료가 쌓인다",
  "slug": "the-cost-of-distrust-from-global-economy-to-daily-life",
  "summary": "재건축·재개발 현장에서 확산되는 ‘선소송 후취하’는 몇 가구의 이주 지연이 전체 사업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실제 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모든 세대에 법적 장치를 거는 방식이다. 이는 관세, 공급망 다변화, 재고 확대, 군비 증강처럼 세계경제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닮아 있다. 상대방을 신뢰하고 문제가 생긴 뒤 대응하던 방식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 자체를 비용으로 계산해 미리 대비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개별 주체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모두가 같은 계산을 시작하면 소송·중복투자·재고·규제 등 사회 전체의 거래비용은 커진다. 세계에서 시작된 ‘불신의 보험료’가 이제 계약과 주거, 정비사업 같은 일상의 영역까지 내려오고 있다.",
  "body": "불신의 보험료, 세계에서 일상으로\r\n\r\n서울의 재건축·재개발 현장에서 조금 낯선 풍경이 확산되고 있다. 아직 이주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합이 전체 조합원과 세입자를 상대로 명도소송을 제기한다. 정상적으로 이주를 완료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후 소를 취하한다. 이른바 ‘선소송 후취하’ 방식이다.\r\n\r\n처음 들으면 지나치게 공격적인 방법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주민은 정해진 기간 안에 이주할 생각일 텐데, 굳이 모든 사람을 소송의 피고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r\n\r\n하지만 조합의 계산법을 들여다보면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r\n\r\n수천 가구가 모두 이주하더라도 단 몇 가구가 끝까지 남으면 철거와 착공이 늦어질 수 있다. 그 사이 사업비에 대한 금융비용은 계속 발생하고 공사비가 추가로 오를 수도 있다. 몇 가구 때문에 수천 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수십억 원, 수백억 원으로 커질 가능성이 있다면 조합으로서는 소송을 미리 시작하는 편이 오히려 저렴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r\n\r\n그래서 과거에는 문제가 발생한 뒤 소송을 시작했다면 이제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예상하고 먼저 소송부터 시작한다.\r\n\r\n이 변화는 단순한 재건축 현장의 풍경만은 아니다.\r\n\r\n오늘날 세계경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r\n\r\n한때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싸고 효율적인 곳에서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품은 필요할 때 주문하고 재고는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국가들은 교역 상대국이 계약과 국제질서를 대체로 지킬 것이라는 전제 아래 경제를 운영했다.\r\n\r\n그것이 세계화가 만들어낸 효율이었다.\r\n\r\n그러나 전쟁과 경제제재, 공급망 단절, 미·중 갈등을 경험하면서 계산법이 달라졌다.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공급이 끊기지 않는 것이 중요해졌다. 하나의 공급망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지역에 생산시설을 나누어 두고, 재고를 더 쌓고, 자국이나 우방국에서 비싼 비용을 들여 생산하는 선택이 늘어나고 있다.\r\n\r\n관세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자유로운 교역이 가져오는 효율보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더 크게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r\n\r\n이 모든 선택에는 공통점이 있다.\r\n\r\n비효율적이다.\r\n\r\n공장을 두 곳에 지으면 한 곳에 집중하는 것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재고를 쌓으면 자금이 묶인다. 관세를 부과하면 거래비용이 증가한다. 군비를 늘리면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었던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r\n\r\n그러나 사람과 기업과 국가는 그 비효율을 알면서도 비용을 지불한다.\r\n\r\n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더 큰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다.\r\n\r\n일종의 보험료다.\r\n\r\n그리고 그 보험료의 이름은 ‘불신’이다.\r\n\r\n재건축 조합의 선소송도 다르지 않다.\r\n\r\n조합이 모든 조합원과 세입자를 실제 분쟁 상대방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약속한 기간 안에 이주할 것이다. 하지만 몇 명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그 몇 명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이 너무 크다.\r\n\r\n그래서 수천 명을 상대로 미리 소송비용을 지불한다.\r\n\r\n개별 조합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r\n\r\n문제는 이런 선택이 사회 전체로 확산될 때다.\r\n\r\n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비용을 지불한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일단 믿고 거래하고, 약속이 깨졌을 때 예외적으로 대응한다.\r\n\r\n하지만 불신이 커진 사회에서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부터 비용을 지불한다.\r\n\r\n계약서를 더 두껍게 만들고, 보증을 요구하고, 담보를 잡고, 재고를 쌓고, 공급망을 이중화하고, 소송을 미리 제기한다.\r\n\r\n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비용은 발생한다.\r\n\r\n이것이 불신의 가장 비싼 특징이다.\r\n\r\n몇몇 사람이 약속을 어길 위험 때문에 약속을 지킬 사람들까지 비용을 부담한다.\r\n\r\n서울의 어느 재건축 조합이 수천 세대를 상대로 명도소송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그래서 단순한 부동산 기사가 아니다.\r\n\r\n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우리의 생활 속으로 내려오는 장면이기도 하다.\r\n\r\n국가들은 관세와 공급망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기업들은 재고와 중복투자로 위험을 대비한다. 그리고 어느 아파트에서는 조합이 미래의 미이주자를 대비하기 위해 아직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주민들에게 소장을 보낸다.\r\n\r\n각자의 선택은 합리적이다.\r\n\r\n그러나 모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위험을 줄이는 동안 사회 전체의 비용은 오히려 증가한다.\r\n\r\n효율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기술이나 자본만이 아니었다.\r\n\r\n상대방이 내일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 계약이 대체로 이행될 것이라는 기대, 문제가 생기더라도 극단적인 행동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그 밑에 깔려 있었다.\r\n\r\n그 신뢰가 약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한다.\r\n\r\n그리고 안전장치 하나하나에는 가격표가 붙는다.\r\n\r\n관세에도, 재고에도, 중복된 공장에도, 더 두꺼워진 계약서에도, 그리고 아직 이주기간이 끝나지 않은 아파트의 명도소송에도.\r\n\r\n한때 국제정치와 세계경제의 이야기처럼 보였던 불신의 비용이 이제 우리의 일상에까지 내려오고 있다.\r\n\r\n불신의 보험료는 어느 날 갑자기 청구되지 않는다.\r\n\r\n조금 더 긴 계약서로, 조금 더 많은 재고로, 조금 더 높은 가격으로, 조금 더 많은 소송으로 천천히 나타난다.\r\n\r\n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r\n\r\n우리가 지불하고 있는 비용 가운데 상당 부분은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한 비용이 아니라,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지불하는 비용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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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_at": "2026-09-17T13:06:18.67826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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