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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재건축·용적률·저출산, 한국 사회 30년의 자본잠식 - 서울은 성장했는데, 왜 서울 사람은 자기 집을 다시 짓지 못하나",
  "slug": "korea-capital-erosion-reconstruction-fertility",
  "summary":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높은 저축과 축적을 통해 현재의 소비와 미래의 자본을 함께 만들어내는 성장사회에 가까웠지만, 이후에는 차입과 자산가격 상승에 의존해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구조가 강해졌다. 특히 주택에서는 건물의 감가상각을 평소 비용으로 인식하지 않은 채 집값 상승을 이익처럼 받아들였고, 정작 재건축 시점이 되자 누적된 교체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용적률을 높이고 대지지분을 희석하는 방식으로 건축비를 충당해왔다. 이는 기존 자본만으로 기존 자본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일종의 자본잠식이며, 자산가격 상승은 그 잠식을 오랫동안 가린 사회적 분식회계 역할을 했다. 생산성이 높은 서울에서 한 세대를 일하고도 주택의 감가상각과 다음 세대의 양육비를 감당할 충분한 잉여가 남지 않았다면, 오늘의 재건축 분담금과 초저출산은 서로 무관한 현상이 아니라 지난 30년간 가계의 자본 재생산 능력이 약화된 결과를 각각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두 개의 결산서일 수 있다.",
  "body": "## 재건축의 회계학적 착시와 '자본잠식'\r\n\r\n\r\n한국의 재건축 논의를 듣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사업성이 없다”, “용적률을 높여야 한다”, “일반분양 물량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 표현들은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계의 언어로 바꾸어 보면 전혀 다른 장면이 보인다.\r\n\r\n\r\n100㎡의 땅을 가진 사람이 그 위에 집을 짓고 40년을 살았다고 하자. 집은 낡았고 다시 지어야 한다. 정상적인 자본보전이라면 그 40년 동안의 소득에서 건물의 감가상각에 해당하는 잉여를 남겨두었어야 한다. 새 집을 지은 뒤에도 100㎡의 토지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돈이 없다. 그래서 1층짜리 집을 2층으로 올리고 새로운 소유자를 들인다. 새 사람이 내는 돈으로 건축비를 충당하고, 대신 토지지분 절반을 넘겨준다.\r\n\r\n\r\n새 집은 생겼다. 생활수준도 유지됐다. 그러나 자본은 줄었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사업성이 확보됐다”고 부른다. 하지만 기존 소유자의 장부에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감가상각되는 건물을 다시 짓기 위해 감가상각되지 않는 토지자본의 일부를 처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자본잠식이다.\r\n\r\n\r\n용적률을 높이지 않고서는 기존 거주자가 기존과 비슷한 주거수준을 유지할 수 없는 것. 자기 소득과 축적만으로는 낡은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없어서 새로운 소유자에게 대지지분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기존 자본만으로 기존 자본을 재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r\n\r\n\r\n## 부동산 착시와 숨겨진 감가상각비\r\n\r\n\r\n그런데 우리는 이 현상을 오랫동안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건물의 감가상각은 매년 장부에 올라오지 않았다.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오히려 자산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건물은 낡아가는데 토지가격 상승이 그 사실을 가려주었다.\r\n\r\n\r\n기업이라면 이상한 회계다. 공장을 40년 동안 돌리면서 기계 감가상각비를 충분히 비용으로 잡지 않는다. 해마다 미세한 이익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기계를 교체해야 할 때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공장부지 일부를 팔아 새 기계를 산다. 그 회사의 재무담당자에게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정말 이익이 난 것이 맞느냐고. 감가상각비를 계상했다면 손실이 아니었냐고.\r\n\r\n\r\n한국의 주택은 이와 비슷한 장부를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감가상각을 인식하지 않았다. 자산가격 상승을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재건축 시점이 되면 수십 년간 숨겨져 있던 자본재 교체비용이 몇 억 원의 분담금으로 한꺼번에 나타난다.\r\n\r\n\r\n그래서 지금 재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분담금을 못 내겠다”는 아우성은 단순히 최근 공사비가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 세대 동안 그 건물을 사용하고도 그 건물을 다시 지을 만큼의 잉여를 축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부족분을 대출로 메우거나, 용적률을 높여 일반분양으로 새로운 소유자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것을 “사업성 개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금 거칠게 말하면, 오랫동안 자본잠식을 가려온 일종의 사회적 분식회계라고도 할 수 있다.\r\n\r\n\r\n## 저축사회에서 차입사회로의 전환\r\n\r\n\r\n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공간 중 하나였다.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고,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하고 세금을 내고 기업을 성장시켰다. 그렇게 높은 생산성을 가진 도시에서 한 세대를 일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소비한 주택의 감가상각에 충당할 만큼은 잉여로 남기고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r\n\r\n\r\n여기서 한국 경제의 지난 세대가 보인다.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이촌향도는 성장의 이야기였다. 시골의 부모들은 논밭을 팔아 자식을 가르쳤다. 실물자본인 토지를 교육이라는 인적자본으로 바꾸었고, 자식은 서울로 가서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진 노동자가 되었다. 땅은 줄었지만 더 큰 자본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본의 소모라기보다 자본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가계는 저축주체였다. 현재의 소득 가운데 일부를 쓰지 않고 미래로 보냈다. 높은 가계저축률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수많은 중산층 가구가 조금씩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r\n\r\n\r\n외환위기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카드대란은 그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저축해서 소비하던 사회에서 먼저 소비하고 미래의 소득으로 갚는 사회로 이동했다. 주택도 마찬가지였다. 소득을 모아 자산을 사는 것보다 미래소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자산을 취득하는 것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r\n\r\n\r\n저축은 현재의 소득을 미래로 보내는 행위다. 차입은 미래의 소득을 현재로 당겨오는 행위다. 따라서 저축사회에서 차입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한 금융기법의 변화가 아니다. 시간에 대한 태도의 변화다.\r\n\r\n\r\n문제는 평균 저축률만 보아서는 이 현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축률이 10%라고 해서 모든 가구가 10%씩 저축하는 것은 아니다. 소득과 자산의 격차가 커질수록 상위계층은 큰 규모의 저축과 투자를 하고, 중간계층은 주택대출과 교육비를 부담하며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하위계층은 차입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전체 평균에는 여전히 저축이 존재하지만, 자본을 축적하는 중산층은 얇아진다.\r\n\r\n\r\n## 자가소유자의 역설과 인적자본(출산율)의 위기\r\n\r\n\r\n이 점에서 전월세 거주자의 장부는 오히려 정직하다. 월세를 사는 사람은 자신이 소비하는 주거서비스에 대해 매달 비용을 지불한다. 집이 낡으면 그것을 다시 지을 책임도 없다. 소득에서 생활비와 주거비를 모두 제외하고 남은 돈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 잉여에 가깝다. 반면 자가소유자는 주거비를 거의 지불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의 건물을 매년 조금씩 소비하고 있다. 그 감가상각을 비용으로 인식하지 않은 채 집값이 오르면 이익이 났다고 생각한다. 장부상의 부자는 되었지만 자본을 재생산할 현금은 남지 않는다.\r\n\r\n\r\n그래서 이런 역설이 생긴다. 20억 원짜리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3억 원의 재건축 분담금을 낼 수 없다고 한다. 이 사람은 정말 20억 원의 자본을 축적한 것일까. 아니면 상당 부분은 토지와 자산가격의 평가이익이었고, 정작 한 세대 동안 소비한 건물을 교체할 재원은 축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용적률을 높여 사업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현금이 부족하니 토지지분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r\n\r\n\r\n그리고 이 문제는 결국 출산율과도 연결된다. 생산성이 높은 도시에서 한 세대를 일하고도 자신이 소비한 물적자본을 재생산할 잉여조차 충분히 남기기 어려웠다면, 다음 세대를 재생산할 여유는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r\n\r\n\r\n주택은 대출로 살 수 있다. 자동차는 할부로 살 수 있다. 소비도 신용으로 당겨올 수 있다. 그러나 아이 한 명은 20년 이상 지속되는 현금지출뿐 아니라 부모의 시간과 경력까지 요구하는 장기투자다. 이미 주거와 노후를 위해 미래소득 상당 부분을 담보로 잡힌 가계에게 다시 아이를 낳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회계적으로도 어려운 주문이다.\r\n\r\n\r\n그래서 한국의 초저출산을 단순히 가치관 변화나 개인주의의 결과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한 세대 동안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면서도 가계가 자본을 보전하고 다음 세대를 재생산할 만큼의 잉여를 충분히 남기지 못하게 만든 경제구조의 결산일 수도 있다.\r\n\r\n## 지난 30년 한국 사회의 손익계산서\r\n\r\n\r\n나는 이 과정을 조금 심한 표현으로 “토사구팽”이라고 부르고 싶다. 산업화와 성장기에는 노동자의 저축과 희생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고, 오래 일하고, 저축하고, 자녀를 교육했다. 그들의 노동으로 도시가 만들어졌고 기업이 성장했으며 자산가격도 올랐다.\r\n\r\n\r\n그러나 성장의 시대가 지나고 나자 그 사람들이 자기 집을 다시 짓는 비용도, 노후를 준비하는 비용도, 다음 세대를 키우는 비용도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 부족분을 사회는 임금과 잉여로 보상하기보다는 신용과 자산가격 상승으로 메웠다. 마지막에는 용적률까지 꺼내 썼다.\r\n\r\n\r\n그래서 지금의 재건축 현장은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지난 30년 한국 사회의 손익계산서가 결산되는 장소다.\r\n\r\n\r\n우리는 성장했다. 서울도 성장했고 기업도 성장했고 아파트 가격도 올랐다. 그런데 그 성장의 과실 속에서 평범한 가계가 자신이 소비한 자본을 다시 만들어낼 만큼의 잉여를 남겼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부자가 된 동시에 조금씩 원본을 까먹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r\n\r\n\r\n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비용을 두 개의 숫자로 보고 있다. 하나는 재건축 분담금이다. 다른 하나는 출산율이다. 하나는 물적자본을 다시 만들 수 없다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자본을 다시 만들 수 없다는 신호다.\r\n\r\n\r\n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용적률을 얼마나 더 높일 것인가”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한 세대를 일한 사람이 자신의 집을 유지할 만큼의 잉여를 남기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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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_at": "2026-09-06T14:35:45+00:00",
  "updated_at": "2026-09-06T22:51:00.99283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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